어느 일요일 아침의 단상
안녕하세요? 방승천입니다.
유독 몸과 마음이 바빴던 한 주의 끝자락 일요일입니다.
저는 주말, 특히 일요일 아침은 온전히 독서에 쓰려고 하는데요.
오늘 손에 잡힌 여러 책들을 읽고 내용을 연결하다 보니,
요 며칠 어지러웠던 머리가 좀 정돈되는 느낌을 받았네요.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쉼'을 가진 것 같은데요.
오늘 아침 제가 느낀 생각들을 소소하게 공유해 보려고 합니다.
이 에세이는 '삶은 짧기에 자유로워야 한다'로 시작합니다. 저도 나이가 들며 이 생각에 점점 더 공감하게 되는데요. 책에서는 믿을만한 어른으로 불리우는 자유로운 어부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어부는 금지 어종이나 작은 물고기는 잡지 않는 "지킬 것은 지키는" 어부인데요. 저자가 이유를 묻자, 어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내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이 대화로 '사람의 꼭 지켜야할 어떤 것이 자유를 만든다'는 자신의 생각을 되새겼다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기로 한 일 - 결코 버릴 수 없는 것 - 에 확실이 묶이고, 지키기로 한 것을 지키면서 자유로워 진다고요. 자유는 아무렇게나 살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사람이 만든 단어일 거라고 말합니다.
이야기 속 어부는 고아였는데요. 부모의 부재로 잉태된 외로움과 쓸씀함을 자신과의 약속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3살 때 돌아가셔서 얼굴도 기억이 안나는 어머님께 누를 끼치는 일, 세상의 나쁜 일, 스스로 후회할 일은 살면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죠.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며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며 우리 사회의 부자유, 그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저의 부자유함을 먼저 떠올려 봤습니다. 저는 제 욕망에 기반한 현실에서의 자유 - 하고싶은 것들, 물질적인 자유 - 사고 싶은 것들을 먼저 생각했고, 그렇지 못한 상황을 부자유라고 연상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반대였죠.
현실적, 물질적인 자유가 아닌 나만의 "진짜 자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짜 부자유"를 먼저 정의해야 한다고요. 즉, 현실적, 물질적 부자유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이 무엇이라고 하든 우리 안에 파괴될 수 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지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요.
지옥이 있어 천국이 도드라지고, 슬픔이 있으므로 기쁨이라는 의미가 명확해지듯, 부자유할 수 밖에 없는 나만의 소중한 가치, 사명, 목적이 있다면, 그 외의 모든 것들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생각을 거듭 강조하면서, 저자는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품위'라고 정의합니다.
책, <<먹는 욕망>>의 서문에 실린 김대수 교수님의 글에도 자유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애초 다이어트와 관련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이 책은 인간의 욕구, 본능, 습관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어 흥미로운데요. 책은 우리 인간은 발달한 뇌를 이용해서 자유를 얻었지만, 정작 그 자유를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뛰어난 뇌로 정착민의 생활양식을 만들고, 문명을 창조해 낸 인간은 단지 생존 하는 것 그 이상의 자유로움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지만, 그 잉여 에너지를 자유로움을 영위하는데 쓰지 않고 더 많은 에너지를 획득하는 데 재투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자유를 얻을 능력은 있었지만,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인간을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존재'라고 설명했고, 자크 라캉은 욕구의 충족에 머무르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주입된 욕망을 다시 쫓는 인간을 '타인의 욕망을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과도한 경쟁, 끊엄없는 비교, 더 큰 정체성 불안을 초래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 무언가를 이루고 난 뒤에도 여전히 공허함을 느끼죠.
그건, 잉여에너지를 어디 써야할 지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관통하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지켜야할 신념일 수도, 행하고 싶은 사명일 수도 있죠. 저는 그게 자신의 이유(Why)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는 부자유에서 나온다라는 윗 글의 맥락에서 보면 자신의 이유가 명확해지고 고정될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자꾸만 생성해 내게 전달해 주는 가변적인 세상의 욕구와 세상의 목표를 쫓는 대신, 세밀한 자기인식을 통해 내가 지켜야 하는 나만의 이유(why)와 목적(purpose)를 깨닫고, 그것을 쫓는데 우리의 잉여 에너지를 쏟는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쫓기는 동시에 쫓는" 현대인의 모습을 도망자에 비유합니다. 마감시한과 독촉, 압박 그리고 강박에 쫓긴 결과 지치고 두렵고 피곤한 상태가 된 현대인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빠른 기술의 변화, 불확실한 미래, SNS를 통해 쏟아지는 정보, 과거가 남긴 아픔과 기억들에 쫓기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 말이죠.
이러한 '피로 사회'는 '과부하된 삶'을 낳습니다. 끊임없이 성과를 내야하고, 능력을 초과하는 요구를 받아내야하는 현실은 직장생활에서는 상수가 되었습니다. 삼성전자에서 10년 이상 근무 후 창업한 인도인 CEO, 판카즈는 우리 직장문화의 현실을 8282, 8585, 네왜 문화로 설명하는데요.
8282와 8585는, 빨리빨리하고 바로바로 결과를 가져와야 하는 서두름 문화의 단면입니다. 네왜 문화는 '네'를 먼저 말하고 나중에 이유를 찾는 수직적 문화를 말하죠. 우리나라는 20세기 후반 전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급격한 경제 성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효율과 생산성 같은 맥락은 매우 중요했죠.
직장 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과도한 경쟁 문화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때문에 학업을 비롯해 취업, 결혼, 사회적 지위 등 거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남들보다 빨리' '서둘러서 빨리'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이 팽배해 진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삶의 강박이 모든 일상을 바쁘게 만든다고 강조합니다.
저는 이러한 문화가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도하게 속도와 효율만을 강조하는 문화, 경쟁 일변도의 문화에서는 부수적 피해(colateral damage)가 따를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효율은 효과를 상쇄할 수도 있고, 경쟁은 '비교'와 '눈치'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겠죠.
저자는 오늘날 바쁨이 명예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바쁜 사람 =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신념이 생겨서 일상의 바쁨이 자랑이 된다고요. '너무 바빠서 늘 피곤하다'며 과로를 자랑하고, 듣는 사람들은 그런 삶을 은근히 부러워 한다는 사람들, 그렇게 '성공'과 '바쁨'을 동일하게 바라보는 사회, 제게는 좀 어색합니다.
바쁨이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사회의 압박과 자신의 강박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때문에 외적으로 바빠보이지 않아도 내적으로는 바쁨에 허덕일 수 있죠. 이러한 물리적 + 심리적 상태는 불안함을 낳습니다. 때문에 저자는 쉼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삶이 홀가분해지려면 무소유 보다 비소모 가 중요하다고요.
그런데, '성공'은 '여유로움'에 더 가까운 개념이 아닐까요?
효율은 input 대비 output을 측정하는, 일의 과정에 초점을 두는 개념입니다. 우리를 바쁘게 하는 것들은 주로 input 에 관련된 노동의 투입과 관련되죠. input을 늘린다고 output이 반드시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반면 효과는 목표 대비 성과를 측정하는, 일의 결과에 초점을 둔 개념입니다.
성공이라는 output의 크기가 같다면, input이 적은 것이 더 효율적인 것이 됩니다. 모든 활동이 생산성과 성과를 담보하지 않기에, 속도에 방향을 희생하지 않는 여유로움도 중요합니다. '위' 뿐 아니라'옆'과 '뒤'도 함께 바라볼 수 있게 하죠. 속도와 방향을 균형적으로 쫓는다면 더 효과적인 성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쉼'도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밀한 자기인식을 위해서도, 자신의 이유와 목적을 인지하고 방향을 가다듬는데도 쉼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쉼이 '결코 버릴 수 없는' 부자유가 되고, 자신의 신념이 되어야, 그 쉼 밖의 영역에서 우리가 원하는 가치 - 자유든, 성공이든, 승리든, 성장이든 - 에 부합하는 삶을 효과적으로 이루고, 그 삶에 효율적으로 이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의 저자가 전공한 '여가학'이라는 학문이 부각될 정도로 '쉼'의 중요성과 효용이 커지고 있는데요. 사회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기업의 불확실성도 커지는 만큼, 우리의 불안함이 커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불안함이 커질 수록 답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내내 떠오르는 아침이었습니다.
남은 주일, 평안하고 고요한 '쉼' 있는 시간 맞으시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