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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May 02. 2016

백수 남자친구

서울에 혼자 살고 있는 내 친구 <란>.

그녀의 남자친구<원>은 요즘에 그렇게 흔하다는 백수 남자친구이다.

한때 누구나 입사하고 싶어하는 대기업 회계부서에서 일을 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독하고 심술궂은 상사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6개월 만에 그만두고 2년째 놀고 있다.

다행히도 남자친구 <원>의 집은 아주 부자는 아니지만 여유가 있는 편이라,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 내려가 집에서 빈둥거리며 2년이라는 시간을 큰 스트레스 없이 보냈다고 한다.

정작 스트레스 받는 것은 여자친구 <란>.

그녀는 결혼이 당장 급한 건 아니었지만 목표와 계획 없이 느긋한 남자친구가 한심해 보였고,

이 남자와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든 것.

하지만 그녀는 아직 <원>과 결혼한 사이도 아니면서 잔소리 심한 다른 여자들이나 엄마처럼 

“일 안 하냐. 돈 안 버냐. 뭐 먹고 살거냐”라는 잔소리를 하며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다.

성숙한 성인이니 시간이 흐르면 본인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을 테고, 자율성으로 정말 원하는 일을 하기를 

존중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건, 한번씩 속이 뒤집어 질 때 농담을 가장한 진심을 최대한 유머러스하게 던지는 게 다였다.

원주에서 서울은 한 시간 반 거리.

한 달에 2~3번 서울-원주를 오가며 데이트를 하던 그녀는 

문득 내년이면 자신이 34살, 30대 중반이 된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화가 났다. 

2년 동안 이게 무슨 짓인가.

참다 참다 폭발하기 직전인 <란>은 자신의 쿨하고 임팩트 있는 캐릭터에 걸맞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 났다.

올해 7월 초 그녀는 원주를 내려가 남자친구와 강원도 회무침에 소주 한잔을 하면서 말했다

“오빠, 우리 결혼하자. 너무 늦어지면 안될 것 같애. 부모님한테 인사 드리러 갈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그 동안 결혼 얘기를 한번도 하지 않던 여자친구가 결혼 얘기를 꺼내면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남자친구는 매우 기뻐하며, 6개월 안에 직장을 구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란>은 기대했다. 남자친구한테 말한 대로 결혼이 당장 급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과감한 제안이 남자친구가 ‘노동’으로 복귀할 수 있는 ‘신의 한 수’이자 강력한 ‘모티베이션’이 되기를..

늘 그렇듯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러갔다. 

그러나 무정한 시간만큼 그녀의 남자친구의 행동은 그리 빠르게 흘러가지 못했다.

여전히 늦게 일어나고 야구경기를 보고, 게임을 하고, 미드를 보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물론 여자친구가 말한 게 있기 때문에 가끔 구직 사이트를 한번씩 뒤적거리긴 했지만

2년이라는 공백, 회사생활에 대한 트라우마, 이미 게으른 생활에 젖은 타성 등으로  

갑자기 생활 패턴과 의지력을 자기 자신도  쉽게 바꿀 수는 없었나 보다.

안되겠다 싶은 그녀는 원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고, 그는 약 2달간 그녀의 집에서 지내며 취직 준비를 했다.

자신의 옆에 있으면 적어도 좀더 열심히 취직 준비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고

그녀는 집에 온 게스트를 위해 음식도 열심히 준비해서 줬고, 가끔은 외식을 시켜주며,  

불편하지 않도록 케어를 해주며 써포트 했다. 

그러나 <란>은 남자친구의 게으른 라이프 패턴을 직접 눈으로 봐야 하는 괴로움을 간과했던 것이다.

남자친구 <원>은 오히려 본인을 챙겨주는 편안한 라이프에 안주하며 더욱 백수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란>은 자신이 프로포즈까지 했는데 이리도 변화하지 못하는 모습에 점점 지쳐가고 실망했다.

술 한잔을 하며 다독거리며 얘기를 해봐도. 화를 내며 얘기를 해봐도. 잘 할 수 있다고 격려를 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자신의 선택이 ‘신의 한 수’는 커녕 ‘신의 저주’가 되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좌절을 경험한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사리가 나오기 전에 그를 다시 원주로 보내고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최후의 만찬을 하는 날.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식용유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해맑은 남자친구 <원>은 룰루랄라~ 식용유를 사러 나갔고, <란>은 한숨을 푹푹 쉬며 돼지고기를 볶고 있었다.

식용유를 사러 갔다 온 <원>이 씩씩! 거리며 들어온다.

<원> - “아놔. 열받어. 어쩌지. 어쩌지”

<란> - “왜? 무슨 일 있어?”

<원> - “구청에서 내 차 번호판 떼갔어! 어쩌지. 어쩌지”

<란> - “엥?? 차 번호판을 왜 떼가?”

<원>- “사실…엄마가 나 용돈 끊은지 꽤 됐거든. 일 안한다고 열받아서.

       그래서 자동차세를 200만원 넘게 못 내고 계속 미뤘더니…번호판 떼 갔네. 아씨. 내 차를 어떻게 찾았지??”

<란> - …………………….

<원> - “번호판 없이 운전하면 벌금만 30만원이야.

원주 우리 집에 있을 때도 안 떼가더니 너네 집에 주차해놨는데 어떻게 알고 떼갔지?? 아놔…”

<란> - …………………….

참고로 남자친구 <원>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카 마니아인데다가, 자신의 차를 애마처럼 아끼는 남자였다.

그런데 자기가 그토록 아끼는 애마의 꽁지를 잘라갔으니 무척이나 당황했던 것이다.

결국 당황과 격분을 오가던 남자친구 <원>이 말했다.

<원> - “자기야. 나 사실 면접 보러 오라는데 있었는데 별로 안 땡겨서 안 갔거든.

        근데 이제 정말 안되겠어. 돈도 없고…차 번호까지 떼이고.

        나 오늘 바로 면접 보고 올께!”

<란> -...그래...

그는 돼지갈비를 먹지도 않은 채 강남구청으로 날라가, 카드할부 10개월로 자동차세를 납부하고 번호판을 찾아왔다.

그리고 바로 면접을 보러 갔다.

<란>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ㅡ 아..남자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면 변하고 행동으로 보여 준다던데…

그를 행동하게 만든 건 ‘나’가 아닌 ‘자동차 번호판’이구나…

나는 그를 2년 동안 변화시키지 못했는데 강남구청이 그를 2시간 만에 행동하게 만드는구나..

고마워요.. 강남구청....하아..

그 동안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강력한 동기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 좀더 본질적으로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자존심도 상했던 것이다.

내가 결혼 얘기까지 꺼냈는데 왜 그는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것인가.

내가 이 사람의 삶에서 그것밖에 되지 않나.

나도 진실은 모르겠다. 

남자친구 <원>이 정말 자신을 변화시킬 노력을 보여줄 정도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건지.

별 잔소리 없는 그녀의 모습에 안일하여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

경제적으로 위급함을 경험하고 나니 그제서야 선택의 여지가 없는 행동을 하는 지독한 우유부단한 성격인건지.

남자친구를 나름 자신만의 스타일과 속도로 노력하고 있었는데 그게 <란>의 눈에는 성에 차 보이지 않았던 건지.

어째든 그녀는 느꼈다.

비록 그는 그녀의 속을 시커멓게 해놓으며 그녀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게는 했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확인할 수 있었다고.

혹자는 <란>을 어리석다 할지 모르겠지만,  

이 지경까지 그 남자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지키기 위해 본인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이후에 <란>과 <원>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결혼에 성공할 수도 있고 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란>이 말하기를 

그것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일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한번 노력해보자는

자신의 인내와 의리, 그릇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후회는 없다고.

그래..긍정적이다.

그것이 너무 안쓰러워,  

하나님이 강남구청으로 하여금 <원>의 자동차세 미납된 숨어있는 차를 발견하게끔 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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