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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May 02. 2016

30대에 하는 이별

                                                                                                                                                                                                                                                                               

범수라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다혈질의 사내였다.

그는 20대 후반 지수라는 여자를 만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범수는 지수에게 계속 구애를 했지만 

지수는 범수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진심은 통할 것이라는 한마디를 믿고 범수는 지수를 포기하지 않았고 

열정과 성의를 다해 그녀에게 대쉬를 했다.

5개월만에 지수는 마음을 열었고, 범수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 누군가를 더 좋아하는 을의 입장은 항상 고통스러운 법.

범수는 지수가 가끔 멋대로 하는 것도 묵묵히 참아냈고 

그녀를 위해 자신의 자존심 따위 내세우지 않았다.

예전처럼 화를 불같이 내지도 않았고 좋은 말로 달래주기 바빴다.

사소한 것에도 헤어지면 그만이라는 지수의 입장 때문에 

범수는 자기 자신을 계속 누그러뜨리며

그녀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많은 일을 함께 겪었고, 

많이 싸우고 많이 사랑하며 서로에게 맞춰나갔다.

그러는 사이 지수도 범수를 깊게 사랑하게 되었고 

어느새 서로 많이 닮아있었다.

교제를 한지 5년째 되던 올해 초 무렵, 

그 둘은 사소한 사건으로 싸우게 되었다.

서로 조금씩 잘못했기에 대화를 하고 충분히 풀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이상하게도 파장이 커졌다.

그 둘의 결혼얘기가 나온 이후의 첫 싸움이었고, 

범수의 케케묵은 억눌림이 터져버린 것이다.

범수는, 결혼이라는 기준을 대놓고 보니 

지수가 좋은 와이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복잡해졌다.

'내가 평생 이 여자를 위해 이렇게 양보하며 살 수 있을까' 

'이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소한 사건으로 사과까지 했던 지수는 

범수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오래 끄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범수 : 잘 생각해봐. 내가 왜이러는지.

지수 : 아니, 미안하다고 했잖아. 별일도 아닌 것 가지고 왜 이러는거야 대체

범수 : 결혼하고도 이렇게 싸우며 살수는 없잖아. 이번 기회에 니가 좀 고쳐봐.

지수 : 뭘 고치라는 거야

범수 : 니 성격. 그 성질머리 좀 고치라고.

지수 : 새삼스레 내 성격가지고 왜 이러는거야. 

범수 : 난 널 위해서 나 자신을 진짜 많이 깎았어. 그런데 넌 어쩜 한번을 져주지를 않냐

지수 : 져주고 이기고가 무슨 말이야. 각자 입장을 얘기하는 거잖아

범수 : 결혼 생각하니까 이대로는 안되겠어. 내 말 무슨 말인지 곰곰히 생각해봐.

대체 왜 저러지..지수는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보니 결혼 얘기가 나온 이후로 범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너그럽고 관대하던 부분이었는데 결혼 얘기가 나온 이후에는 

그녀에 대해 하나 하나 날을 세우고 문제점을 지적한다.

1달이 지나고 범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범수 : 생각 좀 해봤어..?

지수 : 옳고 그른 걸 떠나 한번쯤은 나도 노력해볼께...이 말을 넌 기대했던 것 같아.

범수 : 맞아. 그거였어.

지수 : 그런 말이라면 100번도 더 해줄수 있어. 

범수 : 그래. 그럼 하면 되잖아.

지수 : 근데 본질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야.

         니가 진짜 나에게 원하는게 뭐니.  심플하게 말해봐

범수 : 니 성질 좀 죽이고 나한테 좀 맞춰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니가 너 자신을 좀더 죽이고 내 와이프로서, 아이의 엄마로서 역할을 잘해줬으면 좋겠어.

지수 : ............

아마도 범수는 애인에 대한 기준은 없어도, 와이프에 대한 기준이 있었나보다.

연애할 때는 좋다고 맞춰줄 때는 언제고 이제 결혼한다니까 자기가 원하는 와이프 맞춤옷을 정해놓고

그 옷에 맞춰달라는 그에게, 지수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지수는 범수가 낯설게 느껴졌다.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부정하고 자기자신을 죽이라니..

내가 이렇게 식견이 좁고 보수적인 남자와 5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니..

결혼 전에도 이런데 결혼하고 나면 얼마나 많은 '아내의 역할'을 요구할 것인가.

결혼하려면 혼수로 3억 정도는 해와야 할 수 있어ㅡ라고 말하는 물질적 속물들이

결혼하려면 너의 이러이런 점을 고쳐야 할 수 있어ㅡ라고 말하는 정신적 속물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말도 안되는 얘기에 입이 떡 벌어진 지수는 ㅡ 당장 이 남자와 헤어져야겠다ㅡ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수의 나이는 올해 34세.

지금 이 나이에 5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다면...

그녀는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왠만한 친구들은 다 결혼을 해서 놀 친구도 별로 없고,

남자 만날 기회도 점점 줄어드는데다가 피부의 탱탱함도 예전같지 않다.

지금 이 남자와 헤어지면 어쩌면 노처녀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녀의 내면 속 A와 B가 싸우기 시작했다.

A ㅡ 그냥 범수에게 알겠다. 맞춰보겠다라고 말해버릴까. 말 한마디가 뭐가 어렵다고.

B ㅡ 아니야...이렇게 말도 안되는 요구를 승낙했다가 더 괴로운 시간이 올꺼야

A ㅡ 지금 이 남자랑 헤어지면 사람 쉽게 만날 수 있겠어? 적은 나이도 아닌데

B ㅡ 그래도 아닌건 아닌거지. 나 자신과 자아를 버리기 원하는 남자랑 어떻게 결혼하니?

A ㅡ 에이~ 별 남자 없어. 그냥 그렇게 맞춰가면서 싸워가면서 사는 게 결혼이라니까.

B ㅡ 이 남자는 내 본질을 가지고 문제 삼는 거잖아.

       구체적이고 명확한 요구면 들어주지만 어떻게 이런 말에 네ㅡ알겠습니다 하겠냐구.

A ㅡ 그래도 5년이라는 시간이 있는데 아깝지 않아? 

       여자 나이 34살이면 남자들 부담스러워서 만나지도 않아

B ㅡ 노처녀되기 무서워서 이런 말 참고 하는게 결혼이라면 그따위 결혼 안하고 말아.

A ㅡ 30대 후반되서도 그 얘기를 할 수 있나 보자.

        나중에는 그때 잡을껄~하게 될 거야.

B ㅡ 그건 그때 가서 후회해. 다른 여자같으면 결혼에 대한 압박 때문에 이런 것에 타협할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라고.

어떤 일이든 경험이 쌓이면 점점 더 쉬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어찌 여자가 30대가 되어 하는 이별은 20대보다 더 어려워지는 것일까.

20대. 이별이라는 놈을 처음 경험할 때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순수하고 해맑게 사랑을 하다가, 우리는 너덜너덜한 심장을 경험하게 된다. 

이별을 한 후에 사랑했던 사람과 같이 갔던 장소, 같이 먹었던 음식, 같이 웃고 떠들었던 유머까지

조금이라도 그 사람과 연관된 것들과 마주하게 되면 숨이 턱턱 막혔다.

삶의 의미까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죽을 것만 같이 자존감이 후두둑 떨어진다.

 

그렇게 절대 가지 않을 것 같던 시간들도 결국엔 흐르고, 다른 사랑이 나타나면서 

우리의 심폐는 소생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고통을 기억하기에 우리는 점점 스스로에게 돔과 같은 보호막을 치게 될 수 밖에 없다.

사랑하라ㅡ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웃기시네. 

그 고통을 안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경험과 내공이 쌓인 30대가 되면 좀 쉬워질 줄 알았다. 

내가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사랑하고 나 자신을 더 아끼는 법도 어느정도 배웠으니까.

그런데 이런 제길. 

30대라는 시간의 압박이 우리 발목을 잡는다.

내가 결혼이라는 걸 정말 원하는 건지 확실하지 않은데.

이 사람과 정말 결혼을 하고 싶은 건지, 맞는건지 확실하지 않은데.

그렇다고 노처녀로 초라하고 외롭게 혼자 늙어죽는건 더 싫은데.

그렇다고 확신도 안서는 사람과 나이에 쫓겨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건 더더욱 싫은데.

째깍.째깍.

시간의 흐름이 더 빠르게 느껴지다보니 우리의 마음은 급해진다.

할꺼야. 말꺼야.

빨리 선택해야 한다고 그 누군가가 다그치는 것 같다.

이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맞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면 어쩌지.

이 사람과 헤어지면 다른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괜찮은 사람은 다 결혼했고 이제 주변에 남자도 없는데.

연하남을 만나볼까. 그건 돈많고 이쁜 여자들 얘기 아냐..?

우리는 또다시 이별이 어려워진다.

20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가장 빨리 흐른다는 시기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안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야하는 고통.

그것이 바로 30대에 하는 이별이 다른 방식으로 어려운 이유이다.

그래서 결혼은 서로 잘 모를 때, 서로 한참 좋을 때

이성적인 판단없이 후다닥 해치워야 한다고도 말한다.

또는 그 정도 감당할 것을 미리 각오하고 결혼이라는 문턱에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마음에 안들고 찜찜한 부분이 있더라고, 노처녀가 되어 처절하게 소개팅과 선을 구걸할 바엔

그래도 마음에 안드는 이 부분을 안고 가는 거라고.

그래! 정말 이 사람이야. 내가 찾던 그 남자ㅡ 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졸라 부러운 행운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말 이 사람이야. 내가 찾던 그남자!!!

그런 완벽한 사람이 있기나 할까...생각해보니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확률보다 

그 여자가 남자의 단점 따윈 감당할 수 있는 큰 그릇이라는 확률이 훨씬 높을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다.

장점이 단점을 덮는다고 말하지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장점은 장점이고 단점은 단점이니까.

단점을 보면 영 짜증이 나는데, 또 장점을 보고 풀리고, 또 단점 보면 빡치는데 장점 때문에 다시 좋고..

그런 반복의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결혼은 삶이기에 삶 속에서 내가 계속 보게 될 단점이 잠깐 짱나고 욱하는 정도라면 GOGO하는 거지만

내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ByeBye하는 것이다.

아마 범수는 지수의 성질머리 때문에 자신의 미래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지수는 범수의 결혼 전 조건 때문에 자신의 미래가 두려웠을 것이다.

누구나 미래가 두려울 때가 있다.

결혼이란, 누구나 두려운 미래를 좀 덜 두렵게 해줄 그 누군가를 찾는 것이 아닐까.

사랑이란, 상대방의 두려움을 내게 맡기도록 하기도 하고, 나의 두려움을 의지하기도 하는 것 아닐까.

두려운 미래를 앞두고 무엇이 최선의 선택인지 정답이란 없다.

그저 내가 한 선택에 책임을 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일뿐.

어떻게 하면 이 사람과 내가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존재할 뿐.

이 사람 때문에 겪게 될 그 무언가가 두렵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듯 하다.

30대에 하는 이별.

내가 하는 선택이 무엇이 옳은지는 정답이 없다.

노처녀라는 딱지가 두려워서 그냥 결혼을 하기로 했으면 결혼한대로 최선을 다하고

사랑이 아니기에 또 한번 이별을 선택했다면 이별한대로 후회하지 말고 잘 살아보는 수밖에.

 

뒤돌아보고 어떤 선택이 옳았는가 어떤 선택이 맞았는가ㅡ따지기에

시간은 너무 냉정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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