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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May 02. 2016

판도라의 상자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비밀이 있는가? 

촌스럽기 짝이 없는 옛날 사진들

옷장 안쪽 깊숙이 넣어둔 생리대나 콘돔

남자친구의 친구에게서 느꼈던 설레임

내 몸에 있는 보기 싫은 흉터자국

쌍꺼풀 수술

혼자 집에 있으면 면봉으로 코를 파는 행동

코에 있는 피지를 짜거나 겨드랑이 털을 깎는 모습

잔고가 얼마 남지 않은 통장까지.

우리가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들은 참 많다.

S라는 여자는 아무리 커플이라도 서로 간의 일정 거리는 필요하고,

비밀을 캐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예전 남자친구인 J는 사랑하는 사이라면 모든 것을, 그리고 소소한 것까지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집요한 그의 성격 때문에 S는 부끄럽지는 않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 않던 몇 가지들을 말하게 되었다.

S가 9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S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까지 

웬만하면 모두 공개하고 솔직히 털어놨다.

다행히도 그는 몇 가지 S의 프라이버시를 알면서도 여전히 S를 아껴주었고 변함이 없었다.

심지어 S는 나의 깊숙한 비밀까지 알게 된 그에게 특별한 애착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J는 S의 집에 먼저 도착해 S를 기다리다 몰래 S의 아이디로 메신저에 접속해 

쪽지 보관함에서 S와 S의 전 남자친구와 한 짧은 대화를 보게 되었다.

대화 내용은 그저 안부인사 정도였지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S에게 J는 화가 났고

S는 말할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라는 해명을 해야 했다.

그 이후에도 그는  S의 회사 아이디와 비밀번호(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고 했다.)로 회사 계정에 접속해  S가 야근하지도 않은 날 왜 회사 택시를 타고 부천에 갔는지 추궁을 했다.

 S는 들어온 지 얼마 안된 인턴 녀석이 야근을 했는데 회사택시를 이용할 권한이 없어  S의 이름으로 택시를 불러준 사실을 겨우 기억해냈고, 

왜  자신의 계정에 접속했냐는 화를 내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J는 S의 다이어리에 있는 그 동안 만난 남자친구의 목록, 외장하드에 있는 일기까지 

놀라울 정도의 실력으로 훔쳐보았다.

S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J와 미친 듯이 싸웠지만, 결국엔 J가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이러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용서하고 관계를 이어 나갔다.

어느 날은  S가 그를 만나러 그의 집에 가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올 때 캔 커피 좀 사다 줘라.  

  A슈퍼에 있는 A브랜드 커피 말고, B슈퍼에 있는 B 브랜드 커피로.”

가는 김에 캔 커피를 사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굳이 커피를 브랜드 별로 따지며 먹지는 않던 그가 B 브랜드 커피를 왜 사달라고 하지라는 의문을 가지며  S는 B 브랜드 커피 2캔을 사서 그에게 갔다.

S가 집에 도착하자 그는 황급히 노트북을 덮었고 

별일 없었다는 듯이 함께 저녁을 먹고 캔 커피를 마셨다.

다음날 S는 J를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연하의 남자친구 E의 전화를 받았다.

S ㅡ“오랜만이야”

E ㅡ“오랜만은 무슨, 어제 메신저 해놓고”

S ㅡ“응? 뭔 소리야”

E ㅡ“어제 당신이랑 나랑 메신저로 얘기했잖아. 벌써 치매야?”

S ㅡ“나 정말 안 했는데..뭐야 누가 내 아이디로 접속해서 얘기한 거 아니야?”

E ㅡ“정말?? 헐..어쩐지. 당신 어제 좀 이상하다 싶었어.”

순간 S는 J가 본인의 메신저 아이디를 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S ㅡ“혹시, 어제 나랑 했던 대화 저장 돼있니?”

E ㅡ“응. 저장 돼 있을 꺼야..”

S ㅡ“미안한데 그거 나한테 메일로 좀 보내줄래? 누군지 좀 확인해봐야겠어”

E ㅡ“그래. 알겠어. 뭐야..무슨 일 있는 거야?”

S ㅡ“아니야. 일단 그것부터 좀 보내줘 당장”

E ㅡ“알겠어..당신 아니었구나..”

E가 MS Word에 복사해준 대화내용을 본 S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ㅡ 이하 대화내용

E ㅡ 오늘 나 거기서 안자...ㅋ 09/10/12 17:05 

S ㅡ 내가 몇시에 끝날지 모르겠넹..ㅋ 09/10/12 17:19  

E ㅡ 나 내일도 새벽에 출근해야되서 일찍 봤으면 하는데...ㅋ 09/10/12 17:20  

S ㅡ ㅇㅇ 그럼 내가 12시 전에 못갈꺼 같음 미리 연락줄께 09/10/12 17:21  

E ㅡ 12시면 밤 12시?ㅋ 왜케 일 많이해~ 아무튼 전화줘...~ 09/10/12 17:21 

S ㅡ 오늘나 도발해도돼? 09/10/12 19:53  

     ㅋㅋ 우리마지막에한게 언제지????그때처럼~ 09/10/12 19:55  

E ㅡ 뭔뜻이지? 그게? 09/10/12 19:55  

S ㅡ 도발한댔잖아 ㅋ 09/10/12 19:55  

E ㅡ 차안에서 그거?^^; 09/10/12 19:56  

S ㅡ 부끄러운거야? 다이어리볼까?ㅋ 대략 몇월이지? 09/10/12 19:56  

E ㅡ 진짜 그거? 갑자기 왜? 무슨일 있어? 왜이래? 09/10/12 19:57  

S ㅡ 빨리 말해줘바~~ 09/10/12 19:57  

E ㅡ 나는...... 좀있으면 퇴근하긴 할껀데 갑자기 왜그러지? 이유를 말해줘봐..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지 확실하게 대답해줘야지? 09/10/12 19:58  

S ㅡ 맞아 ~~부끄럽게 09/10/12 19:58  

E ㅡ 난 상관없긴 한데.. 당신 오늘 차 안가지고 왔어? 09/10/12 19:59  

S ㅡ 가져왔지~ 그때 내가 뭐기억날게 있어야해서 부끄러운거 무릅쓰고 물어본겅대 

     쳇 빨리빨리 09/10/12 20:01  

E ㅡ 문자로 하자.. 나 잠깐 나가야돼... 그리고 난 가능하고 나도 차를 가져왔으니 

     일단 당신 사무실 갔다가 집앞으로 이동해야 할 듯 한데? 문자로 답변 줘 09/10/12 20:02  

S ㅡ 지금회의야 쪽지로 09/10/12 20:02  

     몇시에끝나는데? 나생리를 안해서 걱정돼서 09/10/12 20:06  

E ㅡ ......... 우리가 마지막이 내 생일 전 인거 같은데.... 09/10/12 20:08  

     아니다... 4월달 전이었다 09/10/12 20:09  

S ㅡ 아니겠지? 암튼이따봐~ 전화로 물어보기 그래서 이건 없던일로 하자 

     보면 안어색하게~ 09/10/12 20:10  

E ㅡ 사무실로 몇시에 가면 되는데? 09/10/12 20:11  

S ㅡ 전화할께 회의중이라서 쏘리~ 09/10/12 20:11  


S가 캔커피를 사러 간 바로 그 시간이었다.

J는 S가 자신과 사귀는 동안 전 남자친구와 성적 관계를 맺었는지 알기위해

J의 아이디로 접속해 J인척을 하며 전 남자친구와 저런 대화를 나눴던 것이다.

S는 패닉에 빠졌고 정말 J가 이러한 짓을 한 것이 맞는지 대화를 몇십번을 더 읽었다.

S는 섬뜩함 마저 느꼈고, 한동안 이 일때문에 매우 힘들어했다.

어릴 적 S의 아버지는 본인의 이혼 때문에 어린 S가 방황하거나 잘못된 길로 갈까봐

유난히 엄격하게 S를 교육시켰다.

등하교를 할 때에도 매번 차를 태워다 주고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시간도 정해주고

정해진 시간에 비타민을 먹는 것까지 챙겨 줄 정도로 극성스러웠다.

대학생활을 할 때에도 술자리에서 늦게 오는 것 가지고 늘상 싸웠다.

일거수 일투족을 알아야 하고 본인의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의 교육에 

S는 숨이 막히긴 했지만,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니까. 여자니까 걱정 돼서. 아버지는 나와 다른 세대니까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교육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랑이 베이스에 깔려있기 때문에 

원망해보거나 어릴 적 본인의 생각과 아주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과거의 패턴과 기억 때문인지

S는 S에 대한 구속과 침해에는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베이스가 깔려있다고 

무조건적으로 생각 했던 것은 아닐까.

사실 누가 봐도 J는 그 정도가 심했다. 

하지만 더 문제는 명백히 잘못된 사랑의 방식과 구속 또한 자신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라 믿고 싶어하는 S의 사고방식이 더 문제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불편한 사실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적정선의 합리화와 판단, 결론,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판단 또한 자신의 마음이 좋아지는 방향으로 내리고 싶어 한다.

그러한 온전히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마음은 편해질지 몰라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많은 관계도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들만의 합리화된 사정과 사연이 있듯이 우리 또한 수없이 나를 중심으로 한 합리화를 하게 되는 것 같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처럼

내 문제가 되면 그것은 남의 일처럼 그렇게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그래서 남의 사연을 함부로 얘기하거나 관계를 판단해버리면 안되지만

더 중요한 건 나의 관계와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때가 필요하다.

합리화하거나, 우기거나, 믿고 싶은 대로 결론 내려버리지 않고

상식적인 기준과 나의 명확한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보는 것 말이다.

그것은 말처럼 쉽지도 않고 지금 당장 마음은 불편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후회하는 선택을 할 확률을 줄일 수 있으며, 진짜 나 다운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 있어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과 정직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화장을 지운 초췌한 모습과 같은 사소한 것부터 온전히 자기 스스로만의 세계까지 

끊임없이 침범하는 것은 나의 경험상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킬 뿐이다.

결국 S와 J와는 또 비슷한 사건이 또한번 일어남으로 인해 관계가 끝이 나고 말았다.

S는 결국 J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거나

집착증이라는 정신병에 걸린 이상한 남자라고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J는 단지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몰랐을 뿐이었다고 또 한번의 합리화를 했다.

하지만, S는 그 경험을 통해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때로는 그 사람의 비밀과 세계를 모른 척, 인정하는 것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집착=지독한 사랑 이라는 공식도 버리도록 노력을 꽤나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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