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뇌오리 Nov 04. 2022

재도약

시작하지 못한 감성포르노를 외면하고서

#0

과거의 내 글을 읽는 참으로 부끄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게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은 울림을 주기도 한다.

시간의 연속선상에서는 같은 자아이겠지만, 그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고려한다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매거진을 2개를 창설하였다, 제대로 시작하지도 때문에 끝맺음도 없는 감성포르노를 뒤로한 채.


박사과정의 시간은 참으로 녹록지 않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수많은 학우이자 동료들에 비하면 굉장히 게으르며 양아치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마저도 내게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듯하다.


#1

"""

  해야 할 것들로 꽉 차 버려 얕은 우울감에도 빠지지 못하는 날이었습니다. 

  우울이 말랐습니다. 

  삶이 건조해져 갑니다.


  * 일간유서의 시작을 알리는 글의 일부를 미리 공개합니다.

"""


우울에 기생하는 것으로 삶을 일으켜온 삶이었다. 감성포르노를 기획할 때는 적어도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우울이 말라버렸다. 우울을 만들어야 한다.


우는 게 금기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 울지 못하고 꿍쳐둔 앙금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들을 울리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 앙금은 오직 울음만으로 녹여낼 수 있다. 녹아 흐른 눈물은 닦으면 그만이다. 참으로 쉬운 일이며 본인을 살리는 일임에도, 그들은 울음을 금기로 배우며 스스로 행하며 자랐던 것이다. 


이 기회를 통해 같이 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의 우울에 기생하여, 울음이 쉬워졌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본인의 앙금도 스스로 녹여낼 수 있으리.


#2

우리는 잘못 자랐다. 방금 나는 울음이 금기로 배웠고 배운 대로 행하며 자란 우리를 언급했었다. 너무나 잘못된 배움이었고 잘못된 실천이었다. 어디 울음 하나뿐이랴. 이와 관련하여 일전에 '감내할 수 있는 후회'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후회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대한 반항이었다.


숱한 가르침에 대해 반항해야만 내가 숨 쉴 수 있었다. 그 가르침이 나의 숨을 옥죄고 있었다는 뜻이다. 가르침에 반한다니, 이 역시 누군가에게는 금기에 반하는 행동일 수 있다. 부모님의 가르침이라면 어떤가. 우리는 잘못 자랐다 했으나, 정정하겠다. 적어도 나는 잘못 자랐다. 이 말이 어떠한 불효를 상징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이 나를 매도할 만 발언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잘못 자랐고, 그래서 숨쉬기가 어려웠다. 나는 살고 싶었고, 나를 새로이 키우기로 했다. 기존의 양육은 잊어야 했다. 그 어느 하나 불효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불효를 택했다.



*** 정돈되지 않은 글임을 알립니다. 내가 유영하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연말 정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