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살아?
같은 질문을 책상에다 대고 던지는 걸 우스꽝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책상은 무생물이니 질문과 어울리지 않아서 웃긴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으니, 왜 사느냐 묻는 대신 왜 존재하느냐 묻는 것으로 대체하자. 질문을 살짝 바꾸는 순간 우스꽝스럽기보다는 뻔해진다. 책상의 용도는 정해져 있다. 당신이 책을 읽기에 편하시라고. 혹은 도저히 글의 첫머리를 뗄 수 없을 때 내 앞에서 골머리 좀 앓으시라고. 물론 때에 따라 전혀 다른 쓰임새를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들은 삶의 의미보단 재미와 더 연관이 깊어보이니 지금은 넘어가자. 질문은 삶과 존재의 의미였다.
먼저 생겨난 '필요' 혹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상 같은 물건들과 우린 다르다. 왜 존재하는가 묻는 질문엔 애초에 우리가 답할 수 없다.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 편이 낫다. 영혼이 빨려들어가기 쉬운 수채구멍, 덫 같은 독이니까. 생을 두 번 이상 살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다음에 더 나은 생을 살 수 있도록 지금 생을 살아낼 거라고 대답할 수 있겠지. 이번 생에 후회를 남겼던 선택들은 죄다 피해갈 거라고. 하지만 어차피 불가능한 일을 상상하는 데 커다란 에너지를 쏟진 말자.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말하듯, 인생은 그저 한번 흘러가버리고 말, 무용한 밑그림이다.
허무주의에 매료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면 무용하다는 것이 꼭 그렇게 나쁘기만 한가? 내 존재의 용도가 정해진 적 없었다는 건 어찌 보면 위안이 될 때가 분명 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사르트르는 말했으나, 이왕 강제된 자유라면 내 자유를 방해하는 모든 굴레에서 '해방'된 채로 태어났다고 받아들이는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에겐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뒤집어엎은 책상을 썰매삼아 달리며 좀 더 삶을 재미있게 꾸려나갈 힘이 생긴다. 그 순간 책상의 용도는 눈썰매가 되는 것이고, 책상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되는 것이고, 세상에 무수히 널린 책상들 사이에서 구별되는 유일한 책상이 된다. 만들어진 목적이 분명하던 책상에게도 갱생의 기회가 찾아오는 마당에 인간들에게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희망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 희망을 보고 산다. 굳이 답해야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