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퇴근 후 조명을 켜는 순간

- 빛은 켜졌지만, 오늘은 아직 다 꺼지지 않았다

by SH

현관문을 열기 전,

나는 짧게 숨을 고른다.

하루 종일 쥐고 있던 열쇠가

손에 묻은 미열을 그대로 품고 있다.

도어락이 열리고,

무게감 있는 문이 안쪽으로 밀리며

낯선 어둠이 먼저 마중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방 안은 말이 없다.

신발을 벗고, 문을 닫는다.

그제야 작은 고요가 집 안을 채운다.

이곳은 누구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벽으로 가져간다.

조명을 켠다.

찰칵.

짧고 가벼운 소리.

그러나 그 안엔 하루치의 무게가 스며 있다.

불이 켜진다.

천장의 둥근 조명이 부드럽게 퍼지고,

그 빛은 소파 위에 놓인 쿠션,

다 마시지 못한 물병,

살짝 접힌 블라인드 틈까지

하나씩 천천히 덧칠해간다.

그 순간 나는 가만히 멈춰 선다.

빛이 공간을 감싸는 속도와

내가 오늘 하루를 놓아주는 속도가

비슷해진다.

몸은 앉기를 원하지만,

마음은 잠시 더 서 있기를 택한다.

아직 어딘가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몸의 안쪽에서 조용히 맴돈다.

빛은 천천히 방 안을 데운다.

그러나 어떤 고요는 쉽게 데워지지 않는다.

그건 오늘 누군가의 말 한마디일 수도 있고,

답하지 못한 메시지,

혹은 내가 내게 하지 못한 말일 수도 있다.

조명을 켰을 뿐인데,

하루의 가장 진한 장면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형광등 아래 드러나는 먼지,

다녀간 흔적,

그리고 나 자신.

나는 다시 한 번 숨을 내쉰다.

침묵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주는 공간이 되어줄 뿐이다.

조명은 켜졌지만,

오늘이라는 하루는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나는 불을 켠 채,

잠시 주방에 기대 선다.

냉장고의 낮은 진동,

전기레인지 위에 엎어 놓은 냄비,

그리고 그 위에 내려앉은 저녁의 침묵.

불빛이 조용히 벽에 닿는 동안,

나는 오늘 나를 통과한 일들을 한 번쯤 되짚어본다.

아무도 묻지 않지만,

나는 오늘을 나름대로 안쪽에서 다시 정리한다.

무언가를 해내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누구도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공간.

그 안에서 나는 비로소 다시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된다.

의자에 앉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조용한 불빛 아래에서

나는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그 모든 것이,

찰칵— 조명을 켜는 그 한 순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신은 오늘, 어떤 빛 아래에서 숨을 고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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