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기는 닦이지만, 마음의 습도는 그대로 남는다
바닥에 햇빛이 닿기 전, 나는 주방으로 간다.
하룻밤 사이 어둠이 남긴 자리를 따라, 조용히 움직인다.
싱크대 옆에 놓인 물잔 하나. 전날 밤 늦게 마신 물의 흔적이 바닥에 고여 있다.
물을 틀고, 손을 뻗는다.
잔은 가볍다. 물을 머금고 있던 유리는 아무 말이 없다.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감각, 미끄러운 표면, 그리고 아주 작은, 닿지 못한 부분의 온도.
나는 그 조용한 차가움을 느끼며, 잔을 천천히 문지른다.
거품이 일고, 흐르고, 사라진다.
그 사이 시간은 아주 조금씩 앞으로 움직인다.
고요한 아침의 조도 아래, 나는 말없이 반복한다.
문지르고, 헹구고, 뒤집고, 닦는다.
이 짧은 순환 속에서 무언가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컵을 씻는 일은 늘 같은 순서다.
그러나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고,
같은 동작 안에도 아주 미세한 파동이 있다.
어젯밤은 유독 꿈이 많았다.
말하지 못한 말들, 꺼내지 못한 표정, 어딘가 덜 닦인 마음이 눌러앉아 있었다.
그 마음을 안고 깬 새벽은 유리컵의 표면처럼 서늘하고 투명했다.
잔을 씻는 내 손은 어딘가 멍하니 부유하고,
그 속에 있는 어떤 감정은 물속에서만 비로소 얼굴을 드러낸다.
말로는 할 수 없는 무언가.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
나는 그것들을 말 대신 손으로 문지른다.
잔에 남은 물방울은 결국 흘러내리고,
손끝의 미세한 진동은 나를 어딘가로 데려간다.
다 닦은 잔을 천 위에 올려놓는다.
빛이 조심스럽게 유리 가장자리에 앉는다.
마치 어딘가 미안한 듯이, 또는 다정한 듯이.
이 작은 일상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나는 매일 이 시간에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다.
말하지 못한 슬픔, 설명할 수 없는 감정, 그리고 나 자신.
잔 하나를 씻는 이 짧은 시간에,
나는 아주 천천히 회복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나는 말 대신 잔을 한 번 더 헹군다.
그 안에 남은 것은 물이 아니라, 감정의 조용한 퇴적물.
시간은 앞으로 가고,
나는 매일 아침,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물 한 줄기가 유리 벽을 타고 내려가는 속도,
손에 남은 따뜻한 잔열,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늘 하루의 첫 문장을 만든다.
당신의 하루는 무엇으로 시작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