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AND ACTIVIST Dec 16. 2022

우리 모두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고……

1. 짧지만 너무나 강렬한 제목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경제성장,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 성과주의 등에 가득히 물들어 있는 결과중심사회인 한국인들에게 가장 어려운 마인드셋이 바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아닐까?


오직 그 길만 옳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집중해왔는데 그 길이 틀리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2. 인지부조화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신념과 실제가 다른 경우 느껴지는 부조화가 발생하면 그것을 없애기 위해 기존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데 ‘극단적인 합리화’라고 표현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 인지부조화는 1957년 레온페스팅거라는 심리학자가 ‘사난다’라는 종말론 사이비 종교의 케이스를 연구한 뒤에 발표했다고 한다.

종말이 온다고 해서 전재산을 헌납한 사람들이 막상 종말이 오지 않았을 때 본인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기도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사난다신이 종말을 취소했다는 쪽으로 생각을 전환 하더라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런 판단을 내린 사람들 대부분이 고위공직자, 고학력자, 고소득자, 사회인사층 등이었다는 것이다.


틀리면 안된다는 강박 속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현실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이다.


3. 그렇게 보자면 어릴 적에 못생겼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여기저기에서 허구언날 괴롭힘만 당하고 두들겨 맞던 동네북이었고, 학교공부도 잘 하지 못해서 결국 대학진학에도 실패했고, “네가 할 줄 아는게 뭐가 있냐?” 라는 평을 자주 받곤 했던, 심지어는 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공식적으로 (거뭇거뭇한 수염이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혐오’라는 별명을 붙여줘서 청소년기를 송두리째 지옥의 밑바닥을 헤매도록 만들어줬던 것은 내게 너무나도 큰 축복이었다.


미팅을 할 때 마다 폭탄 취급을 받았지만 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멋진 여성을 사귀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매력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고 ‘문제를 외면하고 끌어안은채 주저 앉아 있을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난 나만의 매력을 발견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했다.


학교공부는 싫어했지만 무식하게 살고 싶진 않았고 내가 존경할 수 없는 주변 어른들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다.

난 학교에서 제시하는 과목을 거부했을 뿐 공부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고 학창시절 이후에도 공부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힘도 없고 싸울 줄 몰라서 괴롭힘을 당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 악물고 무술을 배웠고 자처해서 싸움을 해보면서 어디에 가서도 약자로 보이지 않을 덩치와 기술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틀린 존재‘ 였기 때문에 그곳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었고 하나씩 하나씩 내적동기 속에서 자의적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이러니 하게 느껴졌었다.

나는 모든게 틀리고, 틀리는게 당연하고, 그런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발견 되면 너무나 큰 희열을 느낄 수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동안 어릴적부터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인기도 좋았던 이들은 오히려 극심한 우울감을 간직한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마다 인생이 요지경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4. 삶에 미련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초등시절부터 죽음과 가까이에서 살았다보니 죽음에 대한 동경도 깊었고 사람이 어떤 상황에 어떻게 죽는지도 많이 알아보곤 했다.

스스로 죽을 용기는 없기 때문에 일상 속에서 사고사를 당하거나 자연사 하는 경우들도 관심 있게 들여다 봤던 것 같다.

그래서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사는 존재이며, 우주 입장에서 보자면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는 미력한 존재라는 것을…….


내 욕구에 충실해보기도 했다.

욕심껏 돈을 벌어보기도 했고, 실컷 술담배를 즐겨보기도 했고, 마음껏 아무하고나 섹스를 해보기도 했다.

일정 시간이 지나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지속적으로 빠져들어 있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극심한 허무함과 자괴감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건지 그들의 ’인지부조화에 대한 합리화‘ 능력이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스스로 절에 가서 스님도 만나보고, 교회에 가서 목사도 만나보고, 무당집에 가서 무당도 만나보고,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대순진리교와 같은 곳도 가보면서 숱한 곳에서 스카웃을 받았고 숱한 곳에서 쫓겨났다.

열정이 상당했기 때문에 리더의 눈길을 끌었다가 그냥 믿지 않고 질문이 많으며 리더에게 순종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쫓겨난 것이다.

그들을 그냥 믿을 이유 따위는 먼지 만큼도 존재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난 죽음과 가까운 존재이고 삶에 큰 미련도 없었다.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답을 얻고자 하는 내게 그들의 인생은 조금도 부럽지 않은 인생이었고 오히려 콧방귀를 뀌게 만드는 요소들이 발견 되곤 했다.

그들은 내게 오만하다고 교만하다고 했고, 난 그들에게 삶에 미련이 많으신 것 같다고 했다.


5. 절을 참 좋아했고 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아볼까 생각도 자주 했었다.

하지만 난 가정을 이루고 싶었고 자식을 키워보고 싶었다.

그 여정 속에서의 난제들을 풀어보고 싶었고 그것을 불교에서 배울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리더들이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만큼 그분들의 수행법은 존중하나 그것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문제회피’의 영역으로 느껴졌고 무엇보다 ‘관계’라는 난제를 해결하고 싶었던 내게는 더 깊숙하게 와닿을 수가 없었다.


’관계의 종교’라고 불리울 수 있는 ‘기독교‘가 최종 종착지가 되긴 했는데 여기에서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리더들의 모습은 정말 엉망진창이었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쩜 그리도 욕망덩어리들이 미련덩어리들인지……

특히 모태신앙인 사람들과 친해지다보면 그들의 모순이 눈에 밟혀서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성경내용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성경내용이 전하고 있는 내용은 결코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생이라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을 이야기 하고 있었고, 그 당연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를 어떻게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그것이 어떤 섭리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 안에서만 녹이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들과 지옥과도 같은 세상 속에서도 작게나마 천국과도 같은 맛을 누리고 있는 이들의 삶을 통해 크나큰 부러움을 느끼게 되었고 내 무릎은 서서히 꿇려질 수 있었다.


6.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언스쿨링을 하면서 정말 많은 내적갈등상황에 봉착했고 처절하게 무릎 꿇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이들을 언스쿨링 한다는 것은 ‘아이라는 거울을 통해 내 모든 문제들이 수면 위로 상승‘한다는 의미였고, 그것으로 인한 고통은 적지 않았다.


그때마다 떠올렸던 두가지가 있었다.

“내가 틀린 것일 수도 있다.”

“틀려도 상관 없다.”


그리고 이어서 생각한 두가지가 있다.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더 알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것이 언스쿨링의 핵심이고 인생의 정수이다.

우리는 끊임 없이 실수하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면 아직은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디폴트값이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얻게 되는 자유함이 있다.


그리고 내 안에 무궁무진한 탤런트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믿는 것,

타인들의 말과 행동에 일희일비 할 것 없이 그 탤런트를 끄집어 내기 위해 다양한 실수와 실패를 감내하며 도전해나가는 것,

그 여정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

지금 갖고 있는 것을 물질적인 것들을 몽땅 다 날려버린다고 해도 내 가치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

내 가치는 내 존재 자체로 99.99 짜리 순도 있는 사랑의 결정체이며, 그 외의 것은 세상을 다 가진다고 해도 0.01에 해당하는 요소일 뿐이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인생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0.01을 다 가졌다고 해도 자신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겨우 0.01점의 인생을 산다.

그 0.01을 갖고 있지 못해서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99.99점 짜리 인생을 산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인생이 가능해진다.

그런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7. 이것 만큼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것을 모를 때에는 갖고 있어도 불행했고 이것을 안 뒤로는 없어도 행복하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고, 무언가를 갖게 되는 것이 재미 있긴 해도 그것이 나의 행복을 좌지우지 하지 않는다.

몸이 여기저기 삐걱대고 병원을 드나들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그것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다.


영원히 건강하게 살아야 행복하고 그렇지 않다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결국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인생은 원래 끝이 있다.

이 몸뚱이는 원래 시간이 지나면서 낡고 고장나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였기에 조금이라도 건강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자뻑이라도 느껴질 정도로 내가 보기에도 내 하루가 얼마나 찬란한지 모른다. (이 정도면 자뻑 인정…..)

내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고, 도전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건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롭고 짜릿한지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새롭게 시작한 가문에 기초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래서 이 길만큼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다.


이 길을 걸어가면서 난 여전히 순간순간 틀린 결정을 내릴 수 있겠지만 더 공부하면서 더 개선할 여지가 있다는 것도 지금 내겐 행복한 부분일 뿐이다.


제이든 / 패밀리엑셀러레이터  

커뮤니티디벨로퍼 & 마인드트레이너


COO / BRAND ACTIVIST

co-founder / PRIPER

Creator / METACORP


https://linktr.ee/brandactivist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 자신 안의 감정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