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기업은 '시장의 문제'에서, 예술기업은 '우리의 정체성'에서 시작한다
필자는 지난 10여 년간 다양한 업종의 창업자와 단체를 만나왔습니다. IT 스타트업, 제조업, 소셜벤처, 로컬 창업기업, 그리고 예술기업과 단체까지. 그들과 함께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하고 브랜딩 전략을 논의하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같은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를 펼쳐놓고 시작해도, 탄탄한 모델이 나오는 시작점이 완전히 달랐던 겁니다.
일반 기업은 '시장의 문제'가 명확할 때,
예술단체는 '우리의 정체성'이 명확할 때,
비즈니스 모델이 탄탄해졌습니다.
어느 IT 스타트업 창업자와의 첫 미팅. 그는 PPT 첫 장부터 "육아맘들이 겪는 정보 과부하 문제"를 데이터와 함께 쏟아냈습니다. 시장 규모, 타겟 고객의 고충, 기존 솔루션의 한계까지. 문제 정의가 선명했고, 그 위에 그려진 비즈니스 모델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같은 주, 한 현대무용단 대표와 미팅을 했습니다. 그는 "우리 단체가 어떤 춤을 추는지"부터 이야기했습니다.
왜 이 단체를 만들었는지, 어떤 철학으로 공연을 만드는지, 우리 무용수들이 가진 강점은 무엇인지. 정체성이 명확했고, 그 위에 그려진 수익모델은 현실적이었습니다.
처음엔 이 차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리 기업과 예술단체니 까요. 하지만 멘토링을 거듭할수록, 이건 단순히 '영리냐 비영리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하는 근본적인 출발점 자체가 다른 겁니다.
일반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 설계는 '밖'에서 시작됩니다.
고객은 어떤 불편을 겪고 있나? 시장에 충족되지 않은 니즈는 무엇인가? 경쟁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
문제가 명확하게 정의되면, 그다음은 비교적 순조롭게 흘러갑니다. 솔루션을 설계하고, 차별화 포인트를 찾고, 수익모델을 구축합니다. 린스타트업 방법론의 "고객 문제 발견 → 가설 검증 → 제품 개발"도 이 흐름을 따릅니다.
현장에서 만난 탄탄한 스타트업들은 모두 "우리가 푸는 문제"를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바쁜 직장인을 위한 10분 홈트레이닝 솔루션"
"소상공인의 재고관리 고충을 해결하는 AI 도구"
"1인 가구의 식자재 낭비를 줄이는 소분 배송"
문제가 선명하니, 타겟이 명확하고, 가치제안이 설득력 있었습니다.
반면 예술단체의 비즈니스 모델 설계는 '안'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우리가 세상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정체성이 명확해지면, 그제야 사업모델이 그려집니다. 누가 우리의 이야기에 공감할지, 어떻게 그들과 만날지, 어떤 방식으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할지.
멘토링했던 한 연극단은 초기엔 "관객 확보"와 "수익 창출"에만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계속 표류했죠.
전환점은 "우리가 왜 연극을 하는가"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치열하게 논의한 뒤였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질문하는 용기를 주는 연극"
이 한 문장이 정리되자, 교육청 협력사업, 학교 순회공연, 청소년 대상 워크숍이라는 명확한 사업모델이 그려졌습니다. 수익모델도 따라왔고요.
이 차이는 두 세계가 다루는 '가치'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반 기업이 다루는 건 '문제'입니다. 불편함, 비효율, 미충족 니즈. 이건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현상이죠.
그래서 시장조사, 데이터 분석, 고객 인터뷰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술단체가 다루는 건 '의미'입니다. 메시지, 철학, 미학적 가치. 이건 내부에서 출발하는 주관적 표현이죠. 그래서 자기 이해, 정체성 확립, 예술적 비전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측정 가능하지만, 의미는 공감의 영역입니다.
일반 기업의 '고객'은 문제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들의 PAINPOINT(고객이 경험하는 문제/불편)를 해결해 주면 거래가 성립됩니다. 관계는 비교적 명확하죠.
예술단체의 '관객'은 의미에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예술세계에 울림을 느끼면 연결이 만들어집니다. 관계는 훨씬 복잡하고 장기적입니다.
고객을 찾는 건 1:1의 관계를 맺는 거지만,
공감자를 찾는 건 커뮤니티 형성입니다.
일반 기업은 검증된 문제해결 방식을 확장합니다. 더 많은 고객에게, 더 넓은 지역으로, 더 빠르게.
스케일업이 목표죠.
예술단체는 정체성을 더 깊이 구현합니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예술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브랜드 자산을 축적합니다. 깊이가 목표입니다.
복제 가능한 솔루션과 대체 불가능한 세계관의 차이라고 할까요.
비즈니스 모델을 그리기 전에, 이 질문부터 답하세요.
고객이 겪는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그 문제는 얼마나 절실한가?
기존 해결방식의 한계는?
우리 솔루션은 어떻게 더 나은가?
문제가 명확하지 않다면, 아무리 멋진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있어도 비즈니스 모델은 흔들립니다.
시장이 원하지 않는 제품을 만드는 거죠.
현장에서 보면, 실패하는 스타트업 대부분이 "우리는 이런 기술이 있어요"로 시작합니다.
반면 성공하는 곳은 "시장에 이런 문제가 있어요"로 시작하죠.
비즈니스 모델을 그리기 전에, 이 질문부터 답하세요.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가 하는 예술의 고유한 색깔은?
우리가 세상에 던지고 싶은 질문은?
우리와 함께할 사람은 어떤 이들인가?
정체성이 흔들리면, 관객도 혼란스럽고, 수익모델도 산만해집니다. 이것저것 다 하려다가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게 되죠.
멘토링했던 한 예술교육 단체는 "우리는 예술교육 단체"라는 막연한 정체성에서 "놀이를 통해 아이들의 창의성을 깨우는 사람들"로 구체화를 도와 드렸습니다. 그러자 프로그램 방향, 협력 파트너, 수익구조까지 모두 명확해졌습니다.
물론 각 출발점에는 함정도 있습니다.
일반 기업이 '시장의 문제'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체성을 잃기 쉽습니다. 트렌드에 휘둘리고, 경쟁사를 따라가고, 차별화 포인트가 사라지죠.
그래서 성공하는 기업들은 '우리만의 해결 방식', 즉 브랜드 정체성을 함께 구축합니다. 애플은 기술 문제를 푸는 동시에 "다르게 생각하라"는 철학을 심었고, 파타고니아는 아웃도어 니즈를 충족하면서도 환경 가치를 지켰습니다.
문제 해결이 출발점이되, 정체성이 없으면 브랜드가 되지 못합니다.
예술단체가 '우리의 정체성'만 강조하다 보면, 시장과 단절되기 쉽습니다. "좋은 작품인데 왜 아무도 안 보지?"라는 자문에 빠지죠.
그래서 지속가능한 예술단체들은 '공감의 접점'을 찾습니다. 관객이 어떤 지점에서 우리 예술에 울림을 느끼는지, 그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파악합니다.
정체성이 출발점이되, 시장과의 연결점이 없으면 지속가능하지 못합니다.
현장에서 깨달은 건, 결국 '균형'입니다.
일반 기업도 정체성이 필요하고, 예술단체도 시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비즈니스 모델 설계의 '출발점'이 다를 뿐이죠.
일반 기업: 시장 문제(바깥) → 우리의 솔루션(안) → 정체성 구축
예술단체: 우리 정체성(안) → 공감 접점(바깥) → 시장 연결
같은 목적지를 향하지만, 시작점과 순서가 다른 겁니다.
"문제가 명확하면 솔루션이 보이고,
정체성이 명확하면 공감자가 보인다."
지난 10여 년간 다양한 창업자와 단체를 만나며, 비즈니스 모델에 '정답'은 없다는 걸 배웠습니다.
다만 각자에게 맞는 '출발점'은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시장의 문제를 풀고 싶다면, 그 문제부터 명확히 하세요. 만약 당신이 세상에 의미를 던지고 싶다면, 당신의 정체성부터 확립하세요.
출발점이 명확하면, 비즈니스 모델은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당신의 출발점은 어디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