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그릿의 법칙
"모든 완전한 것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묻질 않는다. 대신 우리는 마치 그것이 마법에 의해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현재의 사실만을 즐긴다. 아무도 예술가의 작품 속에서 그것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지 못한다. 그 편이 나은 점도 있다. 작품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보게 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반응이 다소 시들해 지기 때문이다", 니체
요즘 <그릿>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창업을 하기로 마음먹은 후 그다음을 더듬더듬 찾아가는 과정에서 공감되는 이야기가 많아 위안이 되었다. 일련의 생각을 나열하고 정리하는 과정을 통하여 "창업을 하자"는 아주 큰 방향성은 정했으나 어떤 아이템을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해서는 아주 막막했었는데, 그게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창업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모두가 마치 유레카를 외치듯 아주 작은 단서들에서 창업의 불씨를 발견한다. 마치 누군가 그곳에 준비해 둔 것처럼, 그리고 그 사람이 발견하는 게 운명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불씨를 잘 키워서 인터뷰까지 하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위대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안다. 그 말인즉슨, 성공하고 있는 모든 창업자들은 무수히 많은 단서들을 맞이하고 무수히 많은 불씨를 살리려 하다가 그렇게 살아남는 단 하나의 불씨를 키우게 된다는 말이며, 결국 아무런 노력 없이 갑자기 땅에서 솟은 창업아이템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요리에 매료됐고 그게 평생 이어졌어요.”
나는 그릿의 전형들에게서 그런 영화 같은 순간들을 듣기를 기대했다. 허벅지에 자국이 날 정도로 딱딱한 접의자에 앉아 학사모와 졸업 가운 때문에 땀 흘리고 있는 대학 졸업생들 역시 평생의 열정을 발견하는 순간을 그렇게 상상할 것이다. 조금 전까지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다가 어느 순간 분명해질 거라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면담한 그릿의 전형 대부분이 여러 관심사를 탐색하며 수년을 보냈고, 처음에는 평생의 운명이 될 줄 몰랐던 일이 결국 깨어 있는 매 순간과 종종 잠들었을 때까지 차지하는 일이 됐다고 했다.” <그릿>
몇 번의 구질구질한 연애를 하다가 마침내 잘 맞는 이성친구와 만나는 일과 비슷하게 창업아이템 또한 수많은 흑역사와 실수, 추억들을 쌓아가다가 어느 순간 중심이 만들어지면서 단단해지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날 백마 탄 왕자나 공주가 찾아오길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할 가능성을 만나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다행히 나와 남편은 둘 다 새로운 기회를 찾는 것을 좋아하여 종종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마인드맵을 그리곤 했는데, 둘 다 경영학과라 척하면 척하고 순식간에 마인드맵의 가지를 한껏 펼쳐가는 게 재밌었다. 우리에겐 창업 마인드맵 노트가 있어서 심심할 때 이런 아이템은 어떨까 하는 것들을 마구 적어갔다. 대부분 그렇듯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불편감을 위주로 작성되었다. 그중 어떤 아이템은 우리가 잊고 있다가 어느 날 세상에 나오기도 했고, 누군가 비슷한 아이템으로 대박이 났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아주 다양한 마인드맵을 그렸다. 드라이브를 하다가도 여러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마인드맵을 그릴 수 있을 만큼 펼쳐서 그렸다. 어떤 아이디어는 우리가 겪어본 적이 없어서 많이 그리더라도 실효성을 확인하기 어렵기도 했고, 어떤 아이디어는 너무 잘하고 있는 선점자가 있기도 했으며, 어떤 아이디어는 시작하기도 전에 겪을 어려움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마인드맵을 그리는 것은 마치 학부생 때의 조별과제처럼 그 이상을 확인하는 느낌이나 열정은 없이 그 장표에서 마무리하게 되었지만, 적어도 비즈니스를 펼쳐보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 그냥 아주 평범한 퇴근길에 - 주차를 하고 집에 올라가려는데, 아파트 입구에 <견사돌>이라고 쓰여있는 트럭을 보았다. 견사돌이 뭐지, 하며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강아지 치주질환을 위한 건강식품이었다. 재밌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회사에서 시장 조사를 위해 코스트코를 갔는데 관절치료제로 유명한 시스팡에서 출시한 <멍멍팔팔> 제품을 보았다. 재밌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키우는 강아지의 배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유산균을 먹이기 시작했는데, 3일 만에 많이 좋아지는 것을 보고 재밌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장조사를 하고 생각하다 보니 반려동물 헬스케어 관련 아이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창업 마인드맵 노트를 펼치는 대신 파워포인트를 켰다. 왜 이 아이템을 하고 싶은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부터 전체적인 흐름을 구상하고, 시장조사와 어떻게 서비스를 구체화하고 키우고 싶은지 그려나갔다. 작은 불씨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키워가고 싶은 작은 불씨.
한 회사의 마케팅 PM(Product Manager)은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긴장이 된다. 대부분 윗 레벨에서 전체 마켓 사이즈와 전반적인 포트폴리오를 고려하여 신제품을 정해서 주는데, 당연히 모든 신제품이 최고일 수 없고 대부분은 최고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신제품을 경쟁사 대비 매력적으로 만들어서 우리의 챔피언으로 만드는 것이 마케팅과 영업의 영역이다. 특히 마케팅은 전략을 구상해야 하기에, 영업부서가 이 제품에 흠뻑 빠져서 최고의 제품을 판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나설 수 있도록 <작업>을 한다. <작업>은 여러 가지를 포함하는데, 대부분 믿음을 다져가는 과정이다. 브로셔를 만들고 제품 패키지 디자인을 한다. 제품 목업(mock-up) 샘플을 만들고 매대에 경쟁자와 함께 세워보고, 눈에 띄도록 POP도 만들고 단독 매대도 만든다. 프로모션 플랜도 기획하고 영업 시나리오 연습 세션, Best case sharing 세션과 인센티브 프로그램도 마련한다. 그리고 트레이닝 자료를 준비하여 우리 제품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어떻게 이번 분기와 앞으로를 책임질 수 있는지 영업부에게 발표한다. 즉 PM은 작은 불씨(장점)들을 모아 모아 최고라는 믿음으로 불태우고, 그 믿음의 불길들이 모여 실제로 최고를 만들어 내는 작업들을 한다. 믿음이 모여 확신을 만들고 확신이 모여 결과를 만드는 일이고, 고되지만 짐짓 뿌듯하다.
아직 창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진 않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고 그 일에 확신이 든다는 건 많은 용기를 준다. 막연하게 결혼을 꿈꾸면 아득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의 결혼을 꿈꾸면 가까운 미래의 일로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달까. 분명 어두컴컴한 길을 또다시 짚어나가는 일임에도 괜히 든든한 마음. 그리고 이 작은 불씨를 모아 모아 키워가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다. 한 순간의 열정으로 끝날 일이 아닌, 그릿을 가지고 꾸준히 쌓아가는 나의 일. 그리고 이 불씨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라는 질문에도 생각이 미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