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지? 나는 무엇을 원하지? 나는 뭘 가지고 있지?
외국계 회사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다니는 내내 "Resume"는 아주 익숙한 것이 된다. 2년에서 5년 안에 다른 회사로 점프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환경이기 때문에, 6개월에 한 번쯤은 Resume를 업데이트하는 것이 필수이다. "Resume"는 프랑스어로, 그 어원을 따져보면 Resmerer, 즉 '다시 잡다'라는 뜻이고, 그것이 '요약하다'라는 뜻이 되었다고 한다. 즉 나의 경력 여정을 요약해서 한 장에서 두장 사이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역 resume 였다. 나를 늘어놓는 것.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나를 알고 길을 정하기 위해 한껏 펼쳐놓고 늘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디자인 씽킹을 하듯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형형색색의 나를 늘어놓는 일.
일단 '나는 누구인지' 두서없이 생각해보았다. 그냥 나는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사람인가.
나는 29세이고,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6년 차 마케터이다. 경영학과를 나왔고 마케팅과 전략 수업을 주로 들었다. 1년여 정도 창업 학회 - 사실 기업가정신학회라고 부르는데 - 활동을 했고, 내가 원하던 경영 관련 공부와 활동은 그곳에서 다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과 강아지 한 마리와 산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강아지와 함께였는데, 수의사인 아빠와 고객이었던 엄마의 로맨틱한 만남 덕분이었다. 반려동물은 정말 큰 의미가 된다. 이 작은 털북숭이 존재가 매 순간 주는 안정과 무한한 사랑은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다.
요즘 유행하는 MBTI 테스트를 3년 전에 해보았는데 나의 유형은 ENTJ다. 설명을 읽은 친구들이 모두"오 완전 너네"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전형적인 외향형의 사람은 아니다. 목소리를 내는 걸 어려워하지 않을 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삼국지를 너무 좋아해서 여러 가지 해석본으로 몇 번이고 읽었다. 삼국지에는 모든 인간상이 다 나와있다고 하는데, 그 서사와 사람들 사이의 전략과 관계가 너무 흥미롭다. 팀과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는 것은 재밌다. 튀고 싶어 하진 않지만 리드하는 것은 좋아한다. 성과가 만들어지는 게 보이면 재미는 제곱이 된다.
그리고 미술관 가는 걸 좋아한다. 20대 초반에는 디자인 전공을 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는데, 그 정도 창작물을 만들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일찍 깨달아서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감상하는 걸 즐기는데 만족한다. 옷도 좋아한다. 예쁜 옷을 사고 코디하고 입는 것, 그중에서도 클래식하고 모던 -어쩌면 무난한- 옷들을 서로 매치하는 것을 좋아한다.
수영을 4살 때부터 14년간 꾸준히 했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매년 여름 한다. 고요한 물에 잠겨서 오로지 물살에 손을 어떻게 칼날처럼 꽂을지, 발을 어떻게 차야 할지에 집중하며 나아가는 것이 좋다. 결혼하고 나서 새로 생긴 취미 중 하나는 요리하기이다. 기본 원칙을 바탕으로 매번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재밌다. 항상 맛있게 먹는 남편 덕에 다양한 시그니처 요리도 생겼다.
좋아하는 것만큼 중요한 건 싫어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멈춰져 있는 걸 싫어한다. 논의를 하더라도 진행되던가, 끝을 내던가 어느 쪽이든 방향이 정해지도록 노력한다. 전에 다녔던 회사는 굉장히 편하고 소위 '월급루팡'할 수 있는 문화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고인물이 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에 매일이 무섭고 불편했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나의 노력과 고민으로 바뀔 여지가 없는 상황을 싫어한다. '난 원래 그래', '여기가 원래 그런 곳이야. 애쓰지 마', '이 업계가 원래 그래. 그냥 받아들여'와 같은 말들은 힘 빠지게 만든다. 이해가 안 되면 외우라는 것이 제일 싫은 공부법이었던 만큼, 이해하고 그 안에서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즐거운만큼, 그럴 여지가 없는 상황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리고 내가 무얼 할 줄 아는지도 생각해보았다. 이번 회사에서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프로젝트들을 많이 만났었다. 전의 회사에서는 영업과 B2B 마케팅을 했었고 이번 회사에서는 B2C 마케팅을 했다. 회사를 옮기면서 소비재로 필드를 옮긴 것도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새로운 제품을 크게는 5그룹을 론칭해 보았고, 자잘한 품명 단위로 들어가면 20개도 넘는 신제품을 론칭해보았다. 아예 처음부터 시장을 조사하고, 제품 디자인, 광고 문구, 고객 반응까지도 맨땅에서부터 하는 프로젝트들은 매우 고생스러웠지만 결국엔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었고 대부분 성공적으로 성장했다.
입사 이래로 매출 타깃을 100% 성취하지 못한 적은 인수인계받았던 달, 딱 한 달뿐이었다. 1년 만에 인지율 90%에 달하는 유명 브랜드 PM도 되어서 사내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쓰기도 했는데, 전에 시도해본 적 없었던 비디오 커머스를 해보는 것도, 인플루언서와 협업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무엇보다 어디를 어떻게 긁어주면 매출이 오르는 게 보여서 좋았고, 전략과 마케팅에서 "Doing something right"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비즈니스에 집중하고 결과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원하지? 어떤 부분에서 결핍을 느끼고 다음 회전을 다르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마케터는 브랜드와 매출을 키우기 위해서 일을 벌인다. 영업부를 포함한 다양한 부서와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그렇게 늘어놓은 일들 중 성과가 있는 일들 위주로 매니저 및 사장님에게 매달 KPI (* Key Priority Indicatior : 매출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바탕으로 현재 성취 상황을 업데이트하는 목표 설정 및 트랙킹 방식) 보고를 한다. KPI에는 브랜드를 위한 것도 있고 매출을 위한 것도 있다. 브랜드를 위한 마케팅은 즉각적인 매출로 연결되진 않지만 멋지고, 매출을 위한 마케팅은 멋지진 않지만 눈앞에 결과가 보이니 또 나름 재밌다.
그렇지만 허들도 분명했다. 일단, 회사의 제품과 회사의 브랜드를 운영하니 성취하는 당시에는 뿌듯하지만 이로 인해 내 통장에 꽂히는 돈은 월급 제외, 1년에 한 번 전체 인센티브 받을 때뿐이기에 가끔 허무하다. 그리고 욕심 같아서는 일을 이렇게 저렇게 다양하게 벌려서 열매를 잘 거둬들이고 싶은데, 정치적 상황이나 부서 간의 이해관계로 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A/B 테스트를 하듯이 작은 여러 시도들을 통하여 가장 맞는 방법을 찾아가고 싶지만, 무엇이든 보고를 바탕으로 하기에 뭐든 실행하면 성과를 내야 했고 내지 못하면 계속해서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야 함(변명)과 동시에 낙인이 찍힐 위험이 있어, 결국 안전하고 잘 아는 방법을 택하게 될 때도 많았다.
이러한 이유들은 계속 쌓이면서 "내 것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키웠다. <내 손에 쥐는 것을 하고 싶고, 열심히 한 만큼 성과를 보상받고 싶고, 불필요한 절차 없이 달려가 보고 싶다> 펼쳐놓고 보니 손에 쥐이는 것은 아주 단순했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