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창피하면 어때서요
이말년은 웹툰 시장이 형성되는 초반부터 활동했던 웹툰 작가이고, 현재는 유투버 침착맨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도, 유튜브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가 남긴 인터넷 밈(internet meme - 대개 모방의 형태로 인터넷을 통해 사람에서 사람 사이에 전파되는 어떤 생각, 스타일, 행동 따위를 일컫는 말)은 쉽게 접하게 된다.
그중 한 때 유행했고, 여전히 쓰이는 밈 "이른바 명예로운 죽음"이 있다.
이 밈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기안84의 만화 <패션왕>을 원작으로 한 영화 <패션왕>은 흥행에 실패했는데, 이에 대해 기안이 인터스텔라와 같은 시기에 나와서 흥행에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말년은 "인터스텔라가 없었어도 망했을 영화가 다행히도 인터스텔라와 같은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인터스텔라 때문에 망했다'는 핑계를 댈 수 있으니, 이에 감사하라"라고 하는 내용이다.
이 밈은 매우 유행하여, 압도적인 경쟁자가 있긴 하지만 자체적으로 좋지 않았던 작품이나 상황에 대해 쓰이고 재생산되곤 하였으며, 정신승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팩트폭력"의 문구로 자주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명예로운 죽음" 기법을 좀 더 진지하게 파고들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결과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에서 문제를 찾음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일종의 회피법 이며, 그렇기 때문에 편하다. 결과가 좋지 않아도 그닥 수치스럽지 않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허점이 있었다는 생각을 덮어야 명예롭기 때문에, 그만큼 온전하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명예롭지 않더라도 살아남아서 적나라하게 원인을 인정하고 파헤친다면 다음이 좀 더 의미가 있단 말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나 또한 "명예로운 죽음"에 취해 있던 적이 많았다. "(그전에 시간이 한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파서 공부를 못했다", "글로벌 규정상 어쩔 수 없다", "글 꾸준히 써도 뭐 돈도 안되는데", "주변에 보니 주식은 안 하는 게 버는 거던데"같은 것들. 해보지도 않고 안 해야 하는, 못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 누더기처럼 붙이는 말들.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던데, 고작 요만큼 한 거야?"라는 말을 혹여나 듣게 될까 봐, 그저 그게 듣기 싫어 늘어져있던 시간들.
그리고 어느 날, 그런 것들이 모여서 "그래 이 정도 슬렁슬렁했는데 이만하면 됐지"의 삶, 딱 그 정도만큼의 삶만 살다가 가겠다 싶어 퍼뜩 놀랐다. 진짜 무서운 건 명예롭지 않은 실패가 아니라,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인지 평생을 모른 채 신포도라며 위안 삼다가 가는 삶이라는 것을. 그래서 진흙탕에 뒤엎어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보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창업을 한 이후 하는 일은 정말이지 명예롭진 않은 일들이다. 나는 맨땅에 헤딩하고, 어색하게 인맥을 총동원하여 물어보고, 새로운 사람과 업체를 만나러 다닌다. 그렇지만 이것이 죽음에 가깝진 않구나 싶고, 오히려 잘 살아 있다는 느낌에 가깝다. 그리고 면역력이 생기는지, 명예롭게 누워있을 때 상상했던 것보단 창피하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다. 그리고 뭐 좀 창피하면 어때서. 결국 살아있고, 이렇게 원하는 방향을 잡아가며 가고 있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