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3. 인문학적 영감의 발견, 브랜드 일상다반사
" 보첼리의 미소 "
안드레아 보첼리의 미소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1996년 라이브 무대 속 미소를 각별히 애정한다.
보첼리의 세계적 여정을 이끈 곡인 “Time to say goodbye”의 1996년 가을 라이브 무대는 특별한 2초의 순간 때문에 거듭 찾아보게 된다.
물론 그 무대의 상징적 의의는 매우 명쾌하다.
1995년 발매된 보첼리의 첫번째 앨범 “Bocelli”에 수록된 곡 “Con te partiro”가 우리 모두 익숙한
“Time to say goodbye”라는 곡으로 새롭게 태어난 첫 무대라는 점이 다.
게다가 유명복서 헨리 마르케의 은퇴 경기를 위해 특별히 선사된 듀엣 곡으로서 마르케의 등장과 고별 순간에 울려 퍼졌다.
마르케는 고별의 시간에 이 곡이 다시 울려퍼지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3분간 통곡을 하고는 팬들의 뜨거운 응원을 받으며 물러났다.
특별한 은퇴를 위한 곡을 부탁하는 절친 마르케를 위해 새로운 곡을 고민하던 사라 브라이트만의 밝은 선구안이 당시 이탈리아 신예 아티스트의 신곡 “Con te partiro”을 발견하고는 런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로 재녹음하여 보첼리와 브라이트만의 듀엣 무대로 재탄생시켰다.
이렇게 벅찬 뒷 이야기를 지닌 라이브 공연 영상은 두 아티스트가 무대에 등장하여 객석의 환호에 호응하는, 곡이 흐르지않는 여백의 시간 부터 이미 에너지로 가득하다.
그러나 정작 이 영상의 가장 멋진 순간은 다른 곳에 있다.
브라이트만과 다정히 소통하며 객석의 끊임 없는 환호에 밝은 미소로 답하던 보첼리는 이내 진중한 표정으로 공연의 시작을 준비한다.
곧 “Time to say goodbye”의 전주가 부드럽게 흐르고, 이때 마법같은 몇초의 순간이 반짝 드러난다.
전주가 흐르자 보첼리의 차분히 정리됐던 표정이 순간 미소로 활짝 피었다가 곧바로 거둬지는 장면. 마치 아침 태양빛을 만나 활짝 폈다가 일몰과 함께 우산처럼 단정히 꽃잎을 접는 나팔꽃을 본 듯하다.
단 2초 가량의 이 짧은 미소는 앞서의 객석과 호응하던 미소와는 다르다.
앞서의 미소는 곡을 함께하는 브라이트만에게 전하는 신뢰의 악수와 같은 것이며, 한껏 기대하며 응원하는 객석에 보내는 감사의 인사다.
외부를 향한 사회적 연결의 미소인 것이다.
그러나 이 2초의 미소는 철저히 자신의 내면에서 시작되어 내면을 향해 띄우는 미소다.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외부로 펼쳐졌기에 서둘러 차곡히 접어 넣은 속내의 표정.
어린시절 시력을 완전히 잃고도 점자책으로 공부하여 마침내 법대에 진학하였으나, 음악의 열정을 포기할 수 없어 1년의 변호사 경력을 뒤로하고 시작한 늦은 음악가의 생활.
서른 나이에 프랑코 코렐라의 레슨을 받으며 밤에는 재즈바에서 피아노를 치던 보첼리의 이 지난하지만 성실했던 나날이 이날 드디어 세상을 향한 큰 강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자신의 삶처럼 고요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흘러나오는 곡의 전주를 맞아, 보첼리는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다.
자신의 순수한 열정과 노력과 그 결실이자 새로운 시작을 향한 본연의 기쁨.
동시에, 자신의 소중한 아이와도 같은 곡이 넓은 세상을 향해 첫걸음을 떼는 순간을 보는 기쁨 같기도 하다.
넘어지고 무릎 까지면서도 열심히 페달을 구르던 아이의 자전거 바퀴가 힘차게 땅을 밀어 오르는 순간, 드디어 손을 놓으며 어느새 머금게 되는 아빠의 미소.
자신의 결실을 향한 격려와 자식같은 곡을 향한 환희가 어우러진 내밀하고도 벅찬 감정을 그 짧은 미소 속에 만날 수 있어서, 이 2초를 사랑한다.
" 원태인의 미소 "
그런데 그 “미라클 스마일”을 뜻하지 않게 야구장에서 발견하는 순간이 왔다.
2024년 3월 MLB 메이저리그 개막전이 한국에서 열렸다.
미국/캐나다가 아닌 지역에서 개막전이 개최되는 것은 메이저리그 역사 상 9번째인데다 아시아 개최는 2019년 도쿄 이후 처음이라는 점, 게다가 SD파드리스의 김하성 선수와 LA다저스의 오타니 선수를 직관한다는 selling point들이 중첩되어 예매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두 팀의 정식 개막전 이전에 열리는 한국 대표팀과의 스페셜매치 에 있었다.
한국의 젊은 선수들이 MLB 선수들과 맞붙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비록 MLB 선수들이 최선의 최선을 다 하지 않을 시범 경기더라도.
한국 대표팀 라인업은 짜여졌지만, 투수 배정은 예매 시점까지 공식화되지 않기에 5:5의 확률이지만, 한창 응원하는 문동주 선수가 자신의 롤모델인 오타니 선수를 향해 공을 던지는 순간을 볼 수 있기 기원하며 LA다저스 대 한국 대표팀의 경기를 예매했다.
결국 문동주 선수는 다음날 SD파드리스 전에 등판 하게 되어 오타니 선수와 문동주 선수의 2 scene은 볼 수 없게 됐지만, 이 경기에서 뜻밖의 미소를 만나고 말았다.
어쩌면 SD파드리스 전은 예매 포기하고 집관했기에 선명히 볼 수 있었던 순간이다.
이날 3회말 문동주 선수에 이어 두번째로 등판한 원태인 선수가 그 주인공.
젊은 국내 투수들 중 제구가 가장 안정적이라고 평가받는 선수답게, 0-1로 끌려가던 도중 마운드에 오른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자신감있게 투구 했다.
세번째로 맞은 타자 매니 마차도를 상대로 2개의 볼에 이어 낮게 떨어지는 공을 던지자 배트가 크게 헛스윙 했다.
그 스윙의 궤적을 따라 풀려 나듯, 원태인의 의례 침착하던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나오는 것이다.
해설자는 “자신의 주무기인 체인지업이 MLB에 통한다는거죠.”라며 미소를 설명했다.
기자회견에서 다저스의 감독과 선수가 인정했듯, 정말 멋진 체인지업이었다.
그러나 사실 진짜 멋진 건 그 미소였다.
“세계적 선수들과 만나는 큰 경험을 최대한 즐기고 싶었고 체인지업으로 삼진을 한번 잡아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게 됐다”고 꾸밈없이 말하는 젊은 선수.
그게 그날 무거운 어깨로 애쓰다 결국 1점을 내주며 마운드를 내려온 문동주 선수와의 차이였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말하기 좋은 이야기지만, 결국 그게 차이가 되고 말았다.
공을 내보내는 이의 마음. 문동주 선수의, 자신을 더큰 세계에 보여주고 증명하려던 무거운 공이 실점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결과가 보야진 뒤 쉽게 말하는 관중의 약아빠진 후기이기에 면목없는 말이지만.
원태인 선수는 자신의 실력은 사실상 미국이 아닌 일본 리그 진출을 바라 본다고 말해왔다.
겪을 만큼 겪은 5년 차의 현실적 주제파악일 수도 있겠지만, “무턱대고 미국에 가고 싶다고 다 가는 것도 아니고, 실패해서 돌아오고 싶지않다.
진짜 도전한다면 가서 성공할 생각이 들어야 하는 것“이라는 진지한 자기 코칭으로 보인다.
LA다저스와의 경기 이후, “원태인은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지금 같은 활약을 이어간다면 미국행 도전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며 듣기 좋은 이야기들이 쏟아졌지만, 그는 이 또한 크게 개의치 않았으리라 본다.
자신의 체인지업에 이끌린 헛스윙을 향해 드러난 그의 무해한 미소는, 그저 스스로를 향한 아주 자연스러운, 마치 바람이 일어 구름 틈으로 햇살이 반짝 드러나듯한 그런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꿈도 꾸지 않았던 MLB 빅리거들을 상대로 자신 스스로도 모르던 진가를 지금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다.
5세 때 야구신동으로 TV에 출연했던 그는 초중고 내내 팀 에이스였고 중학교 때부터 1차 지명 이야기가 흘러 나왔기에, 2019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 당시 홍준학단장은 “1차 지명은 10년 전에 결정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야구를 시작하고서 늘 에이스였고 항상 주인공이었던 선수.
19세에 프로무대에 데뷔하며 바로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해내기 시작해서인지 2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종종 베테랑으로 오해받는 선수.
그의 선수로서의 외연을 멀리서 바라보면 이렇다.
유아기 때부터 줄곧 빛나온 베이스볼 프린스의 도도함이 연상되지만, 아주 조금만 가까이서 살펴 보면 살짝 상상에서 어긋나 있다.
선발 경기가 잘 안풀린 예민한 날에도 시무룩한 표정일지언정 루틴처럼 묵묵히 팬서비스까지 다 하고 퇴근하는, 마운드에서 흡족하게 소임을 다한 날에는 덕아웃으로 들어가기 전 홈팬들을 향해 모자를 벗어 정중히 고개숙여 인사하는, 덕아웃에서는 선수가 아닌 응원단장 텐션으로 팀 분위기를 띄우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모질고 박한 평가를 하는 선수.
그의 유쾌함은 항상 밖을 향해 있었다.
그날 빅리거를 상대로 헛스윙을 유도하고 보였던 그의 미소는, 온전히 자신의 손을 떠나 소임을 다 해 낸 제 공에 대한 화답이었고, 상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 만의 공을 던져 낸 스스로에 대한 순수한 칭찬이었다.
" 이병헌의 웃음 "
그러고 보니 보첼리의 무대와 원태인의 마운드에 이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가 아닌 그의 연기가 보고 싶어 극장에 가게 되는 배우, 이병헌이 만들어 낸 순간이 그것이다.
그의 2012년 작품,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면, 깊은 밤 조정에서 허균과 내관 만을 앞에 두고 비밀스레 왕 노릇을 연습하는 하선이 나온다.
하선이 문득 내면 깊이에서 올라 온 본심으로 교지를 낭독하자, 내관이 마치 이끌려나오듯 “네 전하“하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뭔가에 씌인듯 혼미했던 하선은 그 대답에 퍼뜩하여 허허 웃음 소리를 낸다.
그것은 즐거워서도, 누가 들으란 것도 아닌, 내면에서 솟아오른 깨달음의 웃음이다.
사람들을 웃기려 지어낸 광대로서의 목소리도, 과장되게 왕을 흉내낸 목소리도 아닌,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아 낸 한 사람이 그 감각에 공명하듯 자연스럽게 내뱉은 가슴 속 탄식같은 웃음.
" 내면의 울림과 브랜드 공명 "
보첼리와 원태인의 미소, 이병헌의 웃음은 모두 외부에 얽힘없이, 그저 자신의 내면을 향한 것이기에, 보는 사람의 마음에 환한 울림을 주고 사뭇 물위에 살랑 떠가는 작은 나뭇잎 처럼 기분 좋게 들뜨게 한다.
그래서 1996년 가을 객석 가득찬 무대 위의 보첼리와, 2024년 봄 고척 스카이돔 마운드 위에 선 원태인과, 1616년 칠흑같은 밤 내밀한 조정의 용상에 앉은 이병헌은, 지겨움도 못 느끼고 계속 찾아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 만이 아는 뭔가를 발견한 자의 순수한 만족감이 그 힘이다.
그 긍정 가득한, 티끌없이 환한 에너지에 나도 공명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서 부터 시작이다.
요즘의 브랜드는 모두 스토레텔링의 힘을 알고 그 진심의 울림을 활용한다.
그래서 이제 그 역효과로 말로만 잘 빚어진 진심은 너무 흔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관건은 브랜드 스스로 내면에서 진짜를 발견하고 스스럼없이 우러난 미소를 지녔냐는 것이다.
그 미소에 사람들은 공명하게 된다.
“우주 간에 나보다 더 높은 존재는 없다”는 뜻의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석가모니께서 수행 끝에 세상 만물의 이치를 통하게 된 후, 홀로 그것을 깨우쳤다는 두려움과 고독함에 외친 말씀이라고 한다.
그 이치와 경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속세의 나는, 저 미소들이 현실의 틈을 살짝 벌리고 건네주는 “온전히 자신을 향해 띄우는 Love myself의 마법” 같은 찰나의 시퀀스를 열렬히 애정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