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이와 난 20대 초반에 걸맞은 풋풋한 사랑을 해나갔다. 기념일에는 소소한 선물을 챙겨주기도 했고 가끔은 내 자취방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밖에서 사 먹는 것도 좋았지만 마트에 가서 같이 장본 후 집에서 요리해 먹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매일이 행복이었다.
’이 생활이 지속되면 좋겠어.’
가끔은 자취방에서 서로를 안았다. 그리고 누운 채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대부분은 우리의 관계에 관해서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경남아. 우리 서른 살 정도 되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
”서른? 아직 한참 남았잖아. 글쎄. 회사 다니고 있으려나.”
”아마 그렇겠지? 그때도 우리는 지금처럼 옆에 있겠지?”
”당연하지. 어디 못 가게 내 옆에 꼭 붙여 놓을 거야. 절대 못 가!”
”바보! 사람일을 어떻게 아냐? 네가 다른 여자 좋다고 가버릴 수도 있잖아. 갑자기 상상하니까 열받네?”
”뭔 그런 상상을 해. 이리 와.”
가끔은 별거 아닌 일로도 우린 토라지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상상이 별거 아니긴 했지만 장담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당시의 우리는 그토록 불안해했나 보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절대 놓지 않겠다는 징표처럼 서로를 안기도 했고 뜨겁게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잠깐 동안의 결속력은 생겼지만 돌아서면 사라졌다.
’불안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냥 함께 있고 싶어.’
소영이도 그랬을까? 그건 모르겠다. 불안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우리는 서로에 의지한 채로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있는 시간을 사랑했다. 붙어 있는 시간만큼은 불안하지 않았으니까. 잠깐이나마 불안이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는 시간이었다.
”사랑해.”
입 밖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그녀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 얼굴을 어루만지더니 내 품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나도 많이 사랑해. 고마워.”
그런 소영이가 더없이 이뻐 보였다. 다시 꽉 껴안은 채 그대로 스르륵 잠이 든다.
”경남아 잘 지내지?”
”전 엄청 잘 지내고 있어요. 엄마는요?"
”엄마야 뭐 똑같지. 근데 우리 아들 왜 이렇게 살이 빠졌니?”
”조금 빠지긴 했는데 운동해서 그래.”
오랜만에 엄마와 스카이프를 사용해 영상통화를 나눈다.
”아들 새벽인데 졸리지 않아?”
”괜찮아요. 아빠는 출근했어요?”
”응. 좀 전에 가셨어. 경남아 엄마가 할 얘기가 있는데..”
”네 얘기하세요.”
”저.. 그게.”
’무슨 말을 하시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엄마의 입을 바라보며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줘. 사실 아빠가 해고당했어. 너한테 미리 얘기하면 걱정할까 봐 이제야 얘기 꺼내는 거야.”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셨다고요?”
”쫓겨났어. 아무리 사정해도 안 받아줬어. 휴 어쩔 수 없지. 아빠 탓이라고 볼 수도 없잖니.”
”그러게요..”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국 회사가 아니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참 힘드네. 아빠도 속이 많이 상하실 거야.”
”아빠는 어디 가신 거예요 그럼?”
”응. 바람도 좀 쐬고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아무래도 우리 캐나다에서 장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한국으로 돌아가도 이젠 적응하기도 힘들 거 같고.”
”장사..”
”조금씩 알아보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한국에 있는 집도 정리해야 할 거 같아. 그리고 정말 미안한데..”
왠지 말하지 않아도 엄마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어? 어.. 미안하다.”
”내일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잘 자라.”
한참 동안 자리에서 멍하니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빠가 해고당했구나.’
우리 집이 유복한 집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해주실 수 있는 선에서는 늘 최대한 지원을 해주셨다. 덕분에 이렇게 한국에서도 지내고 있다. 이리저리 고민해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 결국 다시 캐나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이 섰다. 머리로는 결론을 지었는데 가슴이 아파온다. 소영이가 떠올랐다.
’소영아..’
난 또다시 그녀에게 떠난다는 말을 해야 하는 건가. 이제야 겨우 함께하고 있는데. 소영이 생각 때문에 도무지 잠이 오질 않는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문득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침 8시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