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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Jan 03. 2024

40,특별하다는 생각만큼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열 걸음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었던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였을까? 어떻게든 삶에서 뭔가는 하나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에 대한 혼자만의 강박이 있었다. 뛰어난 사람이 아님에도 뛰어난 사람의 뒤를 어떻게든 따라가야 할 거 같았고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 추천하는 게 있다면 어떻게든 경험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업계에서 아니면 최소한 지인들에게라도 자랑할 만한 게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여기서부터 꼬였나 싶은 게 내가 생각하는 ‘유의미함’이란 결국 주변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서였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튀고 싶었고, 남들처럼은 살지 않겠다며 평범하게 사는 모습에 비웃음을 날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와서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룬 거 없이 냉소만 짓는 사람이었을 거 같다. 추가적으로 다른 사람이 이룬 업적을 평가 절하하기 바쁘기도 했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일 년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던 거 같다.  


’난 글을 쓰며 대단해지고 있어.’ 

’시작은 초라해도 결국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커져 있을 거야.’ 


어떻게 보면 대단한 자존감이다. 딱히 내세울 게 없고 주변에서 크게 관심 가져주지 않음에도 스스로를 굉장히 아끼고 사랑하니까. 하지만 곧 깨달았다.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쓰는 글이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이상하다. 


’공개적으로 쓰는 글은 보여주려는 의도가 맞는데 왜 의미가 없어?’ 


내면에 담고 있는 나의 경험과 지식에 비해 너무 큰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쓰면서 깨달았다. 가짜 경험과 감정으로는 그 한계가 더 빨리 다가와 결국 의미 없는 글이 써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짜로 쓴 글은 읽는 사람도 금세 알아챘다.  남들보다 글쓰기를 늦게 시작한 만큼 당연히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노력의 방향을 잘못 잡으니 안 좋은 형태의 습관이 생기고 고통은 커졌다. 그래도 날마다 글을 쓰고 있다는 만족감에 취해 애써 문제를 덮었다. 




일 년이 지날동안 문제를 덮고 또 덮었다. 그러다 결국 어느 순간 크게 터지는 순간이 왔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펼치고 빈 화면을 바라보는데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멍해져 있는 내가 있었다. 첫 문장을 써야 어떻게든 글이 시작되는데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기만 할 뿐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었다. 문장은커녕 단어 하나 쓰는 것도 못하는 상황. 


내 속에 있던 '마음의 반란'이었다. 더 이상 이렇게 감정을 속여가며 글을 쓰는 건 할 수 없다는 경고였다. 일 년 동안 덮고 또 덮었지만 그 속에서 이미 내 한계치까지 모든 감정을 가져다 쓴 거 같았다. 더 이상 드러낼 수 있는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글만 쓰며 살 생각으로 귀촌한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글쓰기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직장은 그만두더라도 다시 구하면 되는 문제였는데 마음의 문제는 달랐다.  


그렇게 40대의 첫 시작은 잃어버린 감정을 마주한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저 열심히만 살면 된다고 살아왔던 삶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잘못 인지한 열심히 사는 것의 의미를 글쓰기에 적용한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문득 내 마음을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여 년 동안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나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아니었다. 돌이켜보니 항상 누군가의 기대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삶의 결정과 선택이 이뤄져 왔었다. 그런 습관이 쌓이고 쌓여 마치 ‘나다움’이라는 다른 복제된 자아가 있었다. 좋게 표현하면 사회화된 나의 모습. 


그런 나를 부정하고 새롭게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무서웠다. 하지만 계속해서 글을 쓰고 싶다면 한 번은 겪어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더 이상 나를 드러내거나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의 글은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소소하고 투박하더라도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글을 쓰기로 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글은 많이 부끄러웠다. 때로는 감정 과잉이 되면서 손발이 사라지는 거 같았다. 대신 이러한 부끄러움도 극복해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하며 혼자만의 서랍에 넣지 않고 대신 공개하고 반성하고 다시 또 글에 반영해 보는 습관을 가져보기로 했다.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허탈하겠지만 사실이다. 대신 글은 쓸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소설의 형태로 쓰는 글이거나 산문의 형태로 쓰는 글을 올리며 얼굴이 달아오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솔직한 내 모습, 마음을 담았다. 그렇게 마음을 담은 글은 최소한 거짓은 아니었고 부끄럽지만 굳이 숨겨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40대의 난 여전히 많이 부끄럽지만 그렇게 걸음마를 떼듯 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을 겪어내며 글을 쓰고 있다. 올해에도 이렇게 계속 마음을 담아 꾸준히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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