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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Jun 29. 2024

삼국지. 좋아해 본 적 있나요?

51 걸음

초등학교 몇 학년 때더라.. 2학년? 3학년? 기억도 잘 안나네.


친척형 집에 놀러 가자마자 컴퓨터 화면에 뜬 게임을 보고 숨이 멎는 듯했다.


"우와! 뭐야 형?"

"무장쟁패 2!"


심플 그 자체. 더 이상 알려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화면 속 이름 모를 장수들의 난타전이 펼쳐졌다. 그날 이후 내 꿈은 무장쟁패 2가 돌아가는 컴퓨터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알았다. 게임 속 장수들은 [삼국지]라는 작품 속 인물들이라는 걸.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형제가 되기로 맹세를 했네!!"

"유비!"

"관우!!"

"자앙비~ 천하의 무적일세~"


시간대는 모르겠다. 아마도 오후. 저녁을 먹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던 거 같은데. KBS1에서 매일 방영되던 만화 삼국지가 틀어지면 나와 4살짜리 기저귀 찬 사촌동생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말도 못 하던 사촌 녀석이 그때만큼은 나이차를 극복하고 하나 되어 노래를 부르는 광경이라니.


당시에 난 당연히 촉의 팬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유비, 관우, 장비가 그냥 짱인거다. 거기에 제갈공명까지 등장하면 이건 뭐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뒤늦게 하나 또 알은 사실. 내가 좋아하던 삼국지는 정사가 아닌 야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 [삼국지연의]라는 것. 그리고 만화 삼국지를 만든 나라는 일본이라는 것이었다.




인생 게임 중 하나는 [삼국지 영걸전]이다. 물론 이 게임 말고도 무수히 많은 게임을 좋아했고 즐겼지만 삼국지와 관련해서는 단연코 영걸전을 가장 좋아했다. 당시 내 친구들은 영걸전 말고 그냥 삼국지 게임을 더 좋아했던 거 같기도.


왜 재밌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턴제 게임이었기 때문인 거 같다. 턴제 게임이 뭔고 하니. 나 한번, 당신 한번 번갈아 가며 사이좋게 하하 호호 공격하는 형태다. 턴제를 싫어하는 사람은 특유의 이런 느린 전개 자체를 극혐 하기도 한다.


영걸전은 유비의 시점에서 위나라 타도! 한조 부흥! 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였을까 난 유비에게 과몰입해서 굉장히 빠져 들어버렸고 급기야 촉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와 장수들은 쓰레기 취급하기 바빴다.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하던 내가 좋아하던 게임 중 [던전 앤 드래곤 2]가 있다. 어느 날 하교 후 당연스레 오락실에 들렀는데 낯익어 보이는 캐릭터가 날뛰고 있는 신상 횡스크롤 액션 게임이 있는 게 아닌가!


"우와.. 제갈공명으로 플레이할 수 있네?!"


게임의 이름은 [삼국전기] 형태도 던전 앤 드래곤 판박이였다. 하지만 워낙 좋아하는 캐릭터다 보니 역시 과몰입해서 즐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나 즐기고 좋아하던 삼국지연의. 하지만 책을 읽어 본 적은 없었다. 이미 친구들 중에서는 삼국지 척척박사나 미래의 삼국지대학교 입학을 꿈꾸는 애들도 존재했다. 그만큼 삼국지하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책장이 챠르륵 넘어가며 인물에 대한 소개 및 유명한 일화가 저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난 그들이 부러웠다. 콘텐츠는 즐겨봤지만 깊이가 없었다. 내용도 조각조각 난 상태로 알고 있을 뿐 전체적인 흐름도 모르다 보니 긴 대화 앞에서는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내가 더러워서 읽고 만다.'


그렇게 고심 끝에 [이문열의 삼국지]를 택했다. 고심한 이유는 삼국지의 종류가 이렇게나 많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10권짜리 삼국지. 대여점에서 빌려온 책을 펼치는 순간 고릿 고릿한 냄새와 함께 읽기 싫은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난관이었다.


'이걸 읽어 말어?'


꾹 참고 읽었다. 처음엔 지루했다. 하지만 곧 그간 봐왔던 만화, 즐겨왔던 게임 등이 버무려지며 책의 장면은 머릿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읽었다. 손에서 이렇게 땀을 쥐게 만드는 소설이라니. 아니 내겐 이미 소설이 아니었다. 그냥 그들은 신이었다.


10권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크게 숨을 토해냈다.


"후아.. 미쳤어."


첫 번째 완독을 하고 나자 더욱 촉의 인물들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그들의 꿈과 방해를 일삼던 위, 오의 군주와 장수들을 저주했다. 정의의 편을 결국 무너뜨리고 만 반동분자들 같으니라고.


출사표까지 집어던지며 마지막 혼을 불사르려 했건만 결국 와룡의 꿈은 좌초됐다. 마치 내 꿈이 무너져 내린 것 마냥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원통한 그와 측근들의 명복을 대신 빌었다.


"조져졌어야 하는 건 촉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여전히 난 삼국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지금 시대에도 삼국지는 게임과 영화, 애니 등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바이블 같은 책이다.


세월이 흐르고 그 사이 난 몇 번의 삼국지를 더 완독 했다. 기존에 읽었던 저자가 아닌 다른 작가의 삼국지도 읽었고 가끔은 유튜브에서 관련된 영상으로 토크하는 걸 찾아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며 삼국지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도 떠올랐다. 가령 조조의 시점으로 보거나, 조운, 관우 등 다양한 인물을 통해 재구성한 게임이나 콘텐츠도 생겼었다.


그럴 때마다 "와.. 이렇게도 볼 수 있었겠구나?'란 생각도 했고 "반드시 촉이어야 해!"라는 팬심도 옅어졌다. 더 이상 누구 한 명에 과몰입하지는 않게 되었달까.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것도 시간이 흐르고 가치관이 변하면 바뀐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제는 삼국지 하나로도 만족하며 살 수 있던 학창 시절의 내 모습도 변한지 오래다.


이루지 못해서, 이룰 수 없어서, 아스라이 사라져 버린 수많은 책 속 인물들의 꿈, 희망, 좌절. 지금의 내게 삼국지는 더 이상 영웅담이 아니다.


영웅들 틈에서 묵묵히 할 일을 하며 주어진 인생을 버티고 살아내 온 평범한 사람들. 굳이 세세한 작가의 묘사는 없었지만 영웅의 눈을 통해 비친 나와 같은 보통 사람의 이야기가 느껴지기에 아직도 난 삼국지를 보는 게 아닐까?


모처럼 내 인생과 함께 존재했던 삼국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즐거운 추억여행을 할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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