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실 바엔 난 물을 마셔.

128 걸음

by 고성프리맨

"술을 안 마신다고요?"


어느 정도 분위기도 무르익었겠다,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상대는 장소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한 마디에 그는 상당히 당황했다.


"아하하.. 그럴 수 있죠. 원래부터 안 마신 거예요?"

"예전에는 강제로 마시긴 했었는데.. 몸에서 안 받더라고요. 그렇게 조금씩 끊기 시작하다 아예 안 마시는 방향으로 바뀌었네요."


건강상 이유로 마시지 않게 됐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아쉬움은 빠르게 접고 다른 대안을 찾아야지.


"혹시 어디 다른 데로 갈만한 곳 있을까요?"

"카페는 어때요?"


지금 우리가 만난 곳이 카페인데, 다시 또 카페로 이동하자는 내 말이 이상하게 들렸으려나? 개인적인 생각에 대화나누기 가장 좋은 곳 중 하나는 카페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마지못해 제안을 수락한 상대와 다른 카페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흥이 깨져서인지 우리의 대화는 채 30분을 이어가지 못했고, 헤어지게 되었다.


성인이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초래할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건강이 우선이라 술에 입을 대고 싶지는 않은데. 이미 강제로 술을 마셨던 악몽 같던 시간은 다 흘려보냈으니, 이젠 안 마셔도 괜찮겠지.




회사에 입사하고 가장 먼저 배운 건 술이었다. 어째서인지 퇴근 후에도 약속을 잡고 삼삼오오 모여 술 마시러 가는 자리를 만들었다.


"어이 신입!"

"옙!"

"오늘 약속 없지?"

"옛?"

"그냥 따라와라."

"어.. 네."


약속이 없긴 했는데, 뭔가 토 다는 것도 예의가 아닌 거 같으니 따라가야겠지?


"야. 그냥 따라와. 누나가 술 마시는 법 알려줄게 으이그. 허여 멀거하게 생겨서는. 니가 뭘 알겠냐. 누나 하는 대로만 따라와."

"뭐래 ㅋ"


다행인 건 동갑내기 여사친의 존재였다. 나름 회사에서 경리로 오래 일하기도 했고, 강한 성격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도 강단 있게 쳐내는 모습이 때론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첨에는 나도 그녀에게 깨지기 일쑤였지만.


회식 장소는 감자탕집이었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곳이라 간듯한데, 매일 점심도 감자탕만 먹는 입장에선 살짝 지겨운 느낌이 있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겐 메뉴가 상당히 중요했는데, 술을 좋아하는 이에겐 그렇지 않은 거 같기도 했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가고.. 어느새 3시간이 넘어섰다.


"으하하하핫!"

"야이ㅅㄲ야!!"

"@#$@#$@#$"


비속어와 고성이 오고 가며 감자탕집의 분위기는 뜨거워지다 못해 지옥 염화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리필을 해댔는지 모를 감자탕의 국물도 이제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쌓이는 술병 외에 안주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너 이 시끼. 왜 술 안 마셔?"

"어.. 많이 마셨어요."

"너 내가 마시는 걸 못 봤는데? 오늘 잘 걸렸다. 제대로 술 마시는 법 가르쳐주지. 딸꾹-"

"아이씨. 김대리님? 취했으면 곱게 마셔요.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뭐 하는 거예요?"

"왜 그래 임주임? 뭐얏.. 둘이 사귀어?"


절대로 그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사귖..]이라는 소리 앞에 내 볼은 홍당무처럼 빨개졌고, 술자리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모두가 조용해지며 우리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아‼️ 짜증 나게 헛소리하지 마요. 남자친구 있으니까!"

"아 뭐야. 싱겁게."


다행히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하며 당황했던 내 모습에 관심을 비추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야 마셔. 남자 놈이 돼가지고 뭐냐 한잔도 잘 못 마시고. 누나 따라 해봐. 이렇게 탁! 하고 입에 털엇!"


멋지네. 동갑인 주제에 입에다 소주를 탁- 하고 털어 넣다니. 이렇게나 쓰고 맛없는 걸.


"아 뭐 해. 이 정도는 마셔라. 내가 방패도 맨날 해주는데."


그녀는 갖가지 말로 내게 협박, 조롱, 회유를 해가며 결국 술을 마시게 만들었다.


탁-


"으..."

"야 안주. 아~ 해."


나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을 때 입속에 마른안주 같은 게 들어왔다.


"그래 그렇게 마시면 돼."


소주의 끝맛은 썼지만, 그 애 덕에 그날 술자리의 지루함을 견뎌낼 수 있었다.




[오늘 회식이 있을 예정이니, 단 한 사람도 빠지지 말도록.]


"아아아아아..."

"아오 맨날 회식이여 바빠 죽겠는데. 비싼 거라도 사주면 몰라. 또 삼겹살일 텐데. 돈으로나 주던가."


왠지 오늘 일진이 안 좋을 거 같다 싶었는데, 어김없이 과장님의 회식 집합 메시지가 채팅방에 올라왔다. 약속도 잡혀있는데 하필이면 오늘이라니. 하지만 누구 하나 빠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회식자리를 거른다면 심 과장의 괴롭힘이 치고 들어올 테니.


나를 비롯해 동료 직원들은 거부권이 없었다. 단지 볼멘소리를 옆 사람 정도에게나 들리게끔 내뱉어 보는 게 전부. 속으로 욕을 해가며 약속이 있는 사람은 취소를 하기 시작했다.


...


"자자. 이번 한 달도 고생했고 거국적으로 건배‼️"

"와아..."

"이야.. 건배."


한 명도 빠짐없이 회식에 참석해선지 심 과장의 표정이 밝아보였다. 이제부턴 한 명씩 돌아가며 심 과장의 기분을 맞춰줘야 할 시간. 내키지 않더라도 예의상 한마디 정도는 살갑게 해야겠거니.


"어이.. 프리맨도 고생 많았어. 이번에 사람 다시 봤어? 어떻게 잘 해냈대?"

"다 과장님 덕분이죠."

"으하하하핫. 뭐가 내 덕분이야. 본인이 잘한 거지. 그래도 내가 가르쳐준 게 꽤나 도움이 되긴 했나 보지?"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고, 나는 장단만 맞추면 된다.


"그럼요. 매뉴얼 작성은 또 어찌나 꼼꼼히 해놓으셨던지, 장애 터졌을 때도 그대로 대응하니까 해결되더라고요."

"캬하하하핫 잘했어 잘했어!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고!"


매뉴얼이 작성되긴 개뿔. 대충 알아서 하라며 던져준 탓에 사경을 헤맸다. 당신 덕분에 내가 몇 날 며칠을 철야했는지는 알까? 그래도 술자리의 흥이 깨져서는 안 되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넘기는 수밖에.


...


"뭐 이 새끼야? 다시 말해봐! 이거 아주 몹쓸 놈이었네?"


무사히 회식자리가 끝나리란 기대가 깨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얼마 전에 입사한 신입이 심 과장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렸다.


"아니. 과장님이 뭔데요? 업무 시간에도 맨날 노시면서. 일만 잔뜩 받아다가 해결하라고 던져주고 인력관리 제대로 하신 적이 있긴 해요?"

"뭐이 새끼가!"


분위기는 험악해졌고, 사람들의 만류로 회식은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몇몇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끝날 거 같은 회식 분위기 때문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했다. 어쩌면 나도 그랬을지 모르겠네. 내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분명 맞는 말을 내뱉었지만 심 과장이 이 일을 좌시할리가 없다.


심 과장을 어렵사리 집으로 보내버리고 남은 우리는 밖에서 잠시 바람을 쐬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려고 그랬어. 좀만 참지."

"참으려고 했는데 자꾸 더러운 소리만 하잖아요.. 도저히 못 듣겠더라고요. 선배들도 알잖아요. 다들 갑갑하게 왜 저 인간한테 쩔쩔매는 거예요."

"누가 좋아서 그래? 그게 지내기에 편하니까 하는 거지. 좋겠네. 누군 패기도 있고."


결국 이야기가 길어지면 우리 얼굴에 침 뱉기가 될 게 뻔했다. 잠깐의 이야기를 끝으로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거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는 지역 내에서도 특히 저소득층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유명했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직업을 가진 이가 많았고, 무당이나 점술가, 독거노인이 특히 많았던 기억이 있다.


낮의 분위기는 그래도 괜찮았다. 다들 생업에 종사했고, 학생은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으니 그나마 평범한 동네 분위기가 유지될 수 있었다.


문제는 밤이었는데.. 밤만 되면 고성방가로 노래를 부르거나, 신세한탄을 하는 사람이 꼭 있었으며, 한집 건너 치고받고 싸우는 집이 늘 있었다. 늘 술이 문제였다.


힘든 상태에서 마시는 술, 술에 의지하는 삶은 사람을 변하게 만들었다. 낮에는 착하고 친절해 보이던 아저씨가 밤에는 거친 야수 같은 성격이 되어서는 가정폭력범이 되어 버렸다. 술이 문제인지, 사람이 문제인지 순서의 문제는 둘째 치고, 매일같이 들려오는 술로 인한 안 좋은 소식들은 내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당연히 우리 집도 예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기댈 곳 없는 사람이 술에 기대는 그 순간부터, 낯선 이가 익숙한 겉모습을 한채 눈앞에 서있다. 마치 좀비영화에서 좀비로 변한 부모님이나 친구를 마주하는 느낌과 비슷하려나.


- 적당히 마시면 괜찮을 텐데..


적당히라는 선이 어느 정도인지도 잘 모르겠다. 술이라는 녀석이 데려간 멀쩡해 보이던 내 주변의 사람들을 원래대로 돌려주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내 기도는 들어지지 않았고, 언제나 밤이 되면 마을엔 저주가 내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사히 이 시기가 지나가길 빌고 또 비는 것.


내가 그랬듯 동네의 또래 아이들도 비슷한 심정은 아니었을까?

지금의 내가 저주에서 해방되었듯, 그들의 현재도 행복해져 있을까?


확인할 길은 없지만, 부디 그들의 현재가 행복해져 있기를 바란다.




현재 시간 21:49분. 밤에 글을 써서인지 마치 취해 있는 것처럼 글을 쓴 거 같다. 비록 술을 마시진 않지만 밤이 되면 취해있기는 매한가지다.


술로 인해 취하는 기분과는 다르겠지만, 언제나 밤에는 취해 있다. 밤이 주는 취기. 이런 기분에라도 의지해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볼 때면, 꼭 술이 필요한 건 아니지 싶다.


'술도 안 마신 상태로 취함을 느낄 수 있으니 가성비 좋은 거 아님?'


대신 이 취기는 오로지 나 혼자서만 느낄 수 있다. 타인의 공감 없는 혼자만의 취함. 가끔씩 느끼는 이 취기가 나쁘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간혹 다음날 아침에 쓴 글을 보고 나서 손발이 사라질 것처럼 부끄러워질 때가 있긴 해도.


여전히 중2스러운 감성을 가진 탓에 40대에도 철없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봐라. 굳이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이렇게 얼마든지 흑역사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 그러니 날 믿어도 좋다. 꼭 술이 아니어도 취할 수 있음을 믿어보자. 글이 쓰기 어려운 누군가에게 밤의 취기를 활용해 글을 써보기를 권장한다. 그리고 다음 날은 되도록이면 읽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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