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걸음
길게 써야지만 글을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저에는 '양이라도 많아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누군가가 쓴 긴 글을 정독하는 게 쉬운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반문해 봤다. 읽기를 중도 포기해 버린 수많은 글이 떠오르며, 역시 길게 쓰는 게 능사가 아니구나란 생각만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짧게 쓸 자신도 없는데.'
길게 쓰는 또 다른 이유는 짧게 쓸 자신이 없어서다. 특히 짧은 시의 형태로 쓰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써보지 않아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짧은 호흡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담는 방법은 도통 모르겠다. 그러니 길게 설명하며 이리저리 써보고, 수정해 보고, 무슨 얘기가 하고 싶었는지를 뒤늦게서야 발견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건 아닐까.
글의 습관은 평소 말의 습관에도 영향을 주는 거 같다. 왠지 별 거 아닌 것도 이리저리 끌어가며 용두사미처럼 끝낼 때가 많다. 그런 나의 화법 때문에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이는 바로 아내다.
아내는 1을 설명하면 1에 대해서만 얘기하기를 바라는 반면, 난 1의 다양한 이야기를 해야지만 기어코 직성이 풀린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1을 활용한 다른 숫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할 수 있으면 더 좋고.
"제발 1절만 해."
"아직 1절도 못했는데?"
"장난치지 말고."
"진짜라니까.. 이제 겨우 개요 수준이야."
"..."
결국 인내심의 끝을 봐야지만 대화는 마쳐질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이랑 얘기해? ^^"
"난 다른 사람 필요 없는데. 그냥 계속할게."
"아니. 다른 사람 찾아!"
홀로 남겨지고 나면 고독함이 밀려온다. 투머치토킹의 대가 찬호박님의 마음도 이해가 가는 거 같다. 물론 그분은 아내 앞에서만 유독 말 수가 줄어든다는 짤을 남기셨지만.
"그렇구나!"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던 것처럼 한 순간 깨달음이 떠올랐다.
"내 글은 군더더기가 심햇! 쓸데없이 길기만 한다면 분명 아내가 진저리 치는 것처럼 읽어주는 사람들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닐까?"
- 오호‼️ 잘 생각하셨어요.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그냥 깨달음이 있었다는 거지, 짧게 쓰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ㅎ
일주일 정도 처가댁으로 놀러 갔다 왔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뵈니 마음 한편이 괜히 짠해졌었다. 결혼하겠다며 찾아갔을 때만 해도 내 목표는 [살가운 사위]가 되는 거였는데, 현실은 그냥 과묵하고 어딘가 침울해 보이는 모습의 사위가 되어버렸다.
아내에게는 그토록 투머치토커이면서 어째서 장인, 장모님께는 PMI(Please More Information)가 되는 것일까.
- 원래 장모와 사위가 어려운 사이라던데요.
그렇긴 한데, 그냥 꿈꿨던 모습과는 달라서 아쉽다. 내가 그리 밝게 다가서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은 하는데, 마음속으로는 늘 부모님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 속으로만 생각하는데 어떻게 아시겠어요?
그래서 글로 남겨 놓은 것이다. 분명 이 글을 아내가 읽을 것이고, 이런 나의 마음을 어떤 형태로든 정제해서 전해주리라 믿어본다.
"잘못짚었어. 오빠는 너무 보여주기 식이야. 뭔 맨날 착한 사람 코스프레질이야."
"진짜 착해서 그렇다니까?"
"도장 찍고 싶어? 리얼 버라이어티처럼 어디 일거수일투족 찍어 말어?"
프라이빗한 모습도 공개되고, 도장까지 찍히는 최악을 맞이할 순 없으니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아내는 흡족하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 강박장애
신경증의 일종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한 사고나 행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상태를 말한다. [나무위키]
글을 길게 써야지 마음이 놓이는 일.
마음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어떠한 형태로든 토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일.
물건을 뒀던 위치에 없을 때 화가 생긴다거나..
해야 하는 걸 못했을 때 불안감이 커지는 것.
마음을 편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하지만 그 방법은 도통 모르겠다. 여러 조언을 직간접적으로 듣기는 했다. 누군가는 명상을 추천해 줬고, 누군가는 요가를 추천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각자의 노하우를 공유해 줬다. 이론으로는 충분히 좋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 도저히 실전에 적용하지는 못하겠다.
마치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진 못했지만 글이나 영상 등으로 배운 상상연애에는 빠삭한 사람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글쓰기도 그런 나의 마음치료 과정 중 만나게 된 소중한 방법이긴 한데, 이마저도 길게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니..
"그냥 마음 좀 편히 가져. 그러니까 맨날 변비나 걸리지. 우리 집 예민 덩어리야 아주."
'정말로 그래서 변비에 자주 걸리나?'
- 내가 님의 변비 소식까지 알아야 함?
어느 순간 마음을 편히 가지는 법을 까먹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기들을 물에 띄우면 수영을 한다. 양수 속에서 지냈을 때의 경험이 있기에 본능적으로 수영을 할 줄 안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 애들에게도 테스트를 해봤었다. 물론 아이용 목튜브라는 걸 구매 후 착용한 상태에서. (혹시나 아동학대했다고 할까 봐 노파심에 썼습니다요.)
정말로 팔과 다리를 움직여 수영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안타까운 건 당시의 모습을 영상이나 사진으로 남겨 놓은 게 없다는 사실.
하지만 커가면서 수영법을 까먹은 아이들은 다시금 수영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어쩌면 편한 마음을 가지는 법 또한 그렇게 도태되어 버린 게 아닐까?'
여기서 더.. 잠깐만.
멈추자. 멈춰보자.
???
퇴근 10분 전에 보통 난 어땠었더라?
'당연히 못할 건 알면서도 헐레벌떡 칼퇴하는 상상 했었겠지.'
그때는 상상에 그쳤다면, 지금은 현실로 만들면 되잖아?
'그래도 이렇게.. 결론도 짓지 않고 갑자기?'
어차피 늘 결론 잘 못 짓잖아. 그래도 나름 글 써서 기분 좋을 테니 한잔~ 아니 글퇴해.
"선배님들. 어떻게 대충 이렇게 얼버무린 채 글퇴해도 되겠습니까?"
-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헤헷.. 그렇다면 내일 만나요."
[쓸데없이 글을 길게 늘여 쓰기 좋아하는 40대 백수남이 로그아웃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