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시간 2
자극(刺戟)을 추구하다.
[찌를 자, 창 극] 창으로 찔렸을 때 느껴지는 감촉을 자극이라 표현하나 보네. 물리적인 창에 찔린 몸엔 생채기가 나거나 깊은 자상을 입게 될 것이다. 평소에 느껴볼 수 없던 짜릿함, 어쩌면 그 짜릿함을 아득히 넘어선 고통을 경험하는 것. 적당한 자극이 아니라면 위험이 따를지도 모른다. 찔렸을 때의 아픔은 상처의 아뭄과 동시에 까마득히 잊히고, 어느샌가 권태로운 일상을 잊기 위한 더 큰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자극을 추종하며 나의 목표는 새로운 자극을 찾아 떠돌고 있었다.
자극의 형태는 지속적으로 변했다.
공부에 집중하던 모습, 일에 빠져들던 순간, 사랑하는 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 하고 싶은 일에 빠져드는 일상. 자극의 강도는 달랐지만 형태만 다를 뿐, 짜릿하게 감각되는 순간을 내게 선사했다.
괜히 아침부터 있어 보이게 시작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쓰던 대로 편하게 쓰면 될 걸, 무리해서 힘을 줬더니 쓰고 나서도 무슨 말을 쓴 건지 어지럽게 느껴진다. 요즘 들어 고민이 하나 생겨서 아내와 한동안 대화를 나눴던 주제가 있다.
"글을 쓰다 보니까 매번 비슷하게 전개가 되는 거 같아 고민이야."
"그렇군."
"매번 새롭게 쓸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아쉬움이 커."
"그렇구나."
"어떻게 해야 좋을까?"
"그냥 써."
고민의 의미를 아무리 찾으려 해 봐도 찾아지는 건 없었다. 고민을 하면 할수록 '이딴 고민은 왜 한 거지?'라며 고민의 내용이 흐릿해졌다. 그런 상황이 되고 나면 무슨 고민을 했었는지조차 잘 떠오르지 않게 되어버리곤 했다. 지나고 나면 결국 쓰인 것과 쓰이지 않은 것으로 나뉠 뿐이었으며, 다른 어떤 말로도 핑계 댈 수 없는 뚜렷한 결과물만이 남을 뿐이었다.
아직 2개월 가량이 남아 있지만, 올해의 성과를 한번 따져보자. 다른 부분은 차치하고 글의 분량으로만 우선 접근해 봤다.
가시적인 성과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웹소설+브런치+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렸던 흔적을 토대로 살펴보니 대략 평범한 분량으로 출판된 책의 권수로 따졌을 때 9권 내외의 분량 정도가 될 거 같다.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양적으로만 봤을 때의 이야기다.
'살면서 이 정도로 써 본 적이 있었나?'
그렇게 생각해 보니 개인적인 의미부여 정도는 되는 거 같네. 별거 아닌 거 같았던 행동이지만, [매일 쓰기]가 내게 가져다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다. 비록 심해 속을 떠도는 정체불명의 생물체로 보이는 글일지라도 내게는 지나온 시간의 추억이자 의미이다. 무수히 많은 고민의 시간도 포함되어 있었을 텐데, 결국 고민은 사라지고 결과인 글은 남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올해의 성과 중 가장 큰 건, 고민을 고민으로 그치지 않고 글로 바꿔낼 수 있었던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에게 답을 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
- 아스가르 파르하디
나의 글은 어떤 결을 가지고 있을까?
답이 정해져 있는 글일까?
읽고 난 뒤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글일까?
매일 쓰는 행위를 떠나, 글을 쓰는 이상 잘 쓰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매일 쓰기만 한다면 혼자만 간직하는 형태의 일기로 존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어째서 굳이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을 쓰는 것인가.
단순히 내 생각을 타인에게 알리고 공감받기 위함인가?
깊게 파고들다 보면 이해될 것 같던 것조차 모호해지기 시작하며 정신이 아득해져 버렸다. 고민을 떨쳐내면 다시 또 찾아오는 수많은 고민의 형태 중 하나인데, [자존]에 관한 고민이 주를 이루곤 한다.
왜 쓰고 있는가?
써도 괜찮은 사람인가?
이 또한 여전히 답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 글엔 항상 고민과 방황의 흔적이 묻어 있다. 그리고 결론 대신 나를 향한 혹은 미래를 향한 바람과 다짐으로 끝맺음을 한다.
운이 좋게도 이런 나의 감성이 대중으로 분류되는 타인의 감성을 자극(磁極 - 자석 자/극진할 극)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운과 실력 둘 다 필요할 테지. 찔러서 얻는 감각이 아닌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을 가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 수 없는 자극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나를 직접적으로 찔러서 느끼는 자극(刺戟)일 때도 있고, 누군가를 끌어당기며 얻는 자극(磁極)이기도 하다. 무엇이 좋고 나쁘고는 모르겠다. 단지 어떠한 형태로든 [자존]하며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쉬운 듯 쉽지 않은 것 같다. 모두의 정답이 내게는 아닐 때도 더러 있으며, 나의 신념이 오답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탐사는 그치지 않고 계속해 보려 한다. 기록 또한 게으르지 않게 남겨가면서. 그러다 보면 나의 내면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지지 않겠는가?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