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시간 3
"작가란 모름지기 [주제의식]이 있어야지!"
주제의식이라.. 내 글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생각이 존재했었나? 지금의 글이 속할 카테고리는 [40대]가 된 나에 관함이요, 단지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일을 쓰고 있을 뿐인데. 이러한 내용도 주제의식이 있다고 할 수 있나?
'내 주제에 무슨..'
비하의 의도가 아니라 그날그날 쓰기에 급급한 나로선 특별한 주제의식이랄 게 없어 보인다. 그저 하루를 안온하게 보낼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 그게 나다.
생각해 보면 20대엔 큰 뜻(?) 같은 게 있었던 듯도 하다. 아마 삼국지나 역사물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과연 나라는 사람은 어디에 쓰일 인재일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음이 분명하다.
언젠가는 나를 알아주는 이가 나타나 유용하게 쓰일 그날만을 떠올리고 기다려보기도 했다. 누군가를 써보겠다는 마음은 애초부터 품어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굳이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나에 대해 [쓰일 존재]라고 스스로 낙인찍어 놓았던 게 분명하다.
별 거였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는 시끄러운 소식에 귀를 기울였으며, 나보다는 대의(?)를 떠올려 보려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먹고살기 급급했으며, 나의 뜻은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버렸다.
30대에 들어서서는 좀 더 현실형 인간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입장에서는 실로 천만다행이라고 해야겠다. 꿈과 이상을 뒤로하고 현실에 순응하기 시작하자 번잡스러웠던 마음도 정리가 됐다. 그렇게 [평범]이라는 범주에 속해 살아갈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게 어렵겠구나라고 느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주제의식] 때문이었다. 대단한 시각과 식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재단하는 이능을 가진 이만이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읽는 이로 하여금 활자에 몰입해 그 속에서 온갖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만드는 능력. 그런 필력과 주제의식이 뒷받침되지 않는 나와 같은 이가 글을 쓴다? 고개를 저을 수밖에.
고작 40대 밖에 안 된 상태에서 감히 인생의 이치를 터득했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느꼈다.
'누구나가 거창한 주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난 나의 크기에 맞도록 주제를 국소화시켰다. 가끔은 국소화시킨 범주를 벗어나려 몸부림칠 때도 생기지만, 온 힘을 다해 막는다. 그런 글쓰기는 나의 몫이 아닌 까닭에서다.
솔직히 말하면 내 몸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시절이다. 언제는 안 그랬겠냐만 서민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늘 부침이 생기는 일이지 않을까? 그저 온전히 40대를 잘 보내고 다가올 50대도 모나지 않고 무난히 보낼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살짝 욕심을 내서 아내와 아이까지에 대해서라면 괜찮지 않을까?
[가족]으로 묶인 우리에 한해서는 생각해 봐도 괜찮지 않겠어?
그렇게 나의 주제의식이랄 것도 없는 주제에 대한 생각이 정리됐다.
'나는 내 앞에 그어진 선을 넘지 않겠다.'
남다른 주제의식을 가진 사람을 보다 보면 [경외심]이 생긴다. 어쩌면 생김새만 나와 비슷할 뿐 인외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절대로 내게서는 발현될 수 없는 힘을 가진 이. 그런 글을 읽을 때면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곤 한다.
어딘가에 깊숙이 묻혀 있던 20대 시절의 패기 비슷한 게 울컥하고 올라오려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잠깐의 감상이었을 뿐 떠오르려던 발자취는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소설이 쓰고 싶은 걸까?'
현실의 나와 달리 상상의 인물이라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되는 거 아니겠어?
내가 아닌 타인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나에 대한 이야기에서 좀 더 확장된 이야기를 써보고 있다. 나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 못지않게 미지의 존재와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 속에 주제의식이 있는가?]라고 물어본다면 나의 대답은 한결같을 것이다.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다고.
'그냥 편하게 쓰고 싶은 대로 쓸게요.'
그래. 어떻게라도 쓸 수 있으면 된 거지. 그저 오늘의 글을, 나아가 내일의 글을 쓰자. 그 끝이 향하는 방향이 무엇을 가리키는지까진 굳이 생각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