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의 시간 4
오히려 실제보다 무섭게 기억할 수도 있으니 제대로 보려는 거였다.
『작별하지 않는다』
제대로 보는 게 참 어렵다. 한참 동안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본다 해서 제대로 보는 것도 아닌 거 같고.
'어떻게 보는 게 제대로 보는 걸까? 제대로 볼 수는 있을까?'
과연.. 제대로 보고 싶은 무언가는 있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 내가 안다고 생각하고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크기만큼만 보일 텐데. 맞게 판단해서 제대로 보고 있다는 건 또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거지?
오늘도 또 별 거 아닌 생각이 머릿속에서 만개하자 기다렸다는 듯 꿀벌과도 같은 작은 단상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김은희 작가는 글을 쓰려면 기본적으로 사회와 사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쓰고자 하는 대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일이 글쓰기의 출발선인가? 당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마큼 사회나 사람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사회적인 이슈는 솔직히 다루기가 꺼려진다.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제대로 표현해 낼 자신이 없다에 가깝다. 게다가 불완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내게서 함부로 재단하는 듯한 글이 써지기도 바라지 않는다.
'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관심이 많다고 느끼다가도 어떨 땐 무관심하다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철저히 개인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가진 사람에 대한 관심도 자꾸 의심스럽게 느껴진다.
어느 날에는 글이나 영상 속의 누군가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울고 웃다가, 또 다른 날에는 표정 변화 없이 한 귀로 듣고 흘려보냈다. 전자의 나도 후자의 나도 모두가 나일 텐데, 태도는 180도 달랐다.
'의심스러워.'
사회와 사람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한 건가?
대체 무엇을 위해, 무슨 말을 남기고 싶기에 글을 쓰는 걸까?
글을 씀으로써 내가 전할 수 있는 기운은 존재하는가?
도저히 나는 모르겠다. 썼던 글을 읽고 또 읽다 보면 의도를 파악할까 싶어,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여러 번 읽어 보기도 했다. 읽을수록 글 안에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에 대한 생각은 옅어지고 단지 잔상 같은 기분만 남아 있음이 느껴졌다. 어쩌면 의도랄 것도 없이 그저 당시의 기분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스케치해 놓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침부터 어마어마한 강풍이 불어닥쳤다. 바깥에 신호등이 휘청거리고 낙엽이나 꺾인 나뭇가지가 회오리를 일으키며 흩날렸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 사이로 비명과도 같은 바람 소리가 들어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바람이 불면 통학 버스를 기다리는 게 고역이라 차로 등교를 시키곤 한다. 혹시 모를 위험상황에 대한 대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몸이 편하다. 한번 느껴버린 편안함은 쉽게 버리기가 힘들다.
"알바 그만둔 덕을 다 보네. 오늘 같은 날 출근했다고 생각하면 끔찍해."
그만둘 때만 해도 안절부절못하던 아내는 어느새 퇴사찬양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기회가 생긴다면 다시 일을 구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에 느껴지는 몸의 안락함에 젖어 들은 게 분명하다.
"아니. 난 좀 편하면 안 되냐? 너가 감히 이렇게 글에서 날 디스해?"
디스의 목적으로 글을 쓴 건 아니기 때문에 당당히 쓸 수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날이 궂은날에 집에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이란 말인가. 그래도 약간의 아쉬움은 존재한다.
나의 일상이 많은 이에게 공감받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 글을 읽고 혹시나 백수로 팔자 좋게 살아가는 자의 잡담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맞는 말이잖아‼️)'
글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공감이 필요할 텐데, 내 글의 어디에서 공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우울해졌다.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모를, 내게 인간적인 관심이 있을지 없을지 모를 타인의 공감을 얻는 일. 과연 나는 그런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인가?
입버릇처럼 아내에게 하는 말이 있다.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하는 게 중요하지."
"남이사!"
입버릇이 되어버린 이유는 나도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누군가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들을 때마다 괴로웠다. [일을 잘한다는 것]에 대한 재정의를 내려보려고 수도 없이 고민도 해봤다. 그러다 보면 '어째서 나는 일을 잘하지 못하는 걸까?'라며 풀이 죽었다. 그래도 월급을 받으려면 일을 해야 했기에 풀이 죽은 나의 심리상태와는 별개로 일은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일 못한다고 까이던 나도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자 관리하는 업무를 하게 됐었다.
'내가 이래도 되나?'
하지만 내게 주어진 일이었으니 안 한다면 회사를 떠나야 했다. 어쩌면 주어졌다기보다는 움켜쥐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또 누군가가 내 상사가 되어 "너 일 XX 못하잖아!"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보단 낫겠다 싶은 마음에서였다.
문득 [제대로 본다는 것]도 비슷한 일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어쩌면 난 계속해서 제대로 못 볼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라기 보단, 앞서서 제대로 보아왔다고 평가받는 혹은 대중적인 공감을 얻어낸 지표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가만히 앉아 생각으로만 그쳐서는 절대로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의 성공 유무를 떠나 제대로 보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보자. 어떻게든 그런 기회를 만들 수 있게 움켜쥐어 보려는 노력이라도 해보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제대로 된 시선이라는 게 나한테도 생겨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