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etacognitio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성프리맨 Oct 29. 2024

선택이 있을 뿐이구나.

인지의 시간 5

속세의 때를 벗겨내고 번뇌를 잊고자 스님은 머리를 민다. 평범했던 일상을 벗어나 수도를 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일. 머리를 미는 것과 동시에 복잡한 마음이 칼같이 정리되는지는 경험해보질 않아서 모르겠지만, 여하튼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순간임을 부정할 순 없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퇴사 후 3년 차가 되었고, 곧 4년 차가 될 것이다. 여전히 나의 글 곳곳에서는 회사원이었던 시기의 내 모습이 출현하고 있으며, 아직도 나의 정체성은 그 시절의 감성과 분위기에 갇혀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회사원으로서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소위 전향에 성공해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의 공통적인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보다 보면 하나같이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었다.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변해있었다. 현재 하고 있고, 새로이 정립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


내게 부족한 모습이구나.




그렇다면 [나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진작에 새로운 정체성을 정립시켰어야 했는데. 뭐 하고 살았단 말이야?'


후회해 봤자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니, 지금부터라도 변해야지.


현재의 나는 과연 무엇을 지향하는가? 무엇을 꿈꾸는가?


이리저리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크리에이터]이다. 크리에이터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떠나 명확히 유튜버, 틱톡커, 인스타그래머, 블로거, 작가, 영상제작가 등 구체적인 한 가지로 정의할 순 없는 건가?


'정의 내릴 수 없다.'


퇴로를 차단하고 싶지 않기에, 차마 배수의 진을 치고 이 길 끝에 죽음과도 같은 [마지막]만이 있음을 감당할만한 깜냥이 되지 않기에, 여러 가능성을 배제시킬 수가 없다. 이런 결론을 내린 이유는 단순히 [자신감]이 부족해서인 것일까?


'아마도..'


내 길을 한눈에 알아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의 슬픈 운명쯤으로 해두자. 중첩되는 불확실함 앞에 망설임을 없앨 방법을 모르겠다. 그러니 덜 망설여지게, 덜 두렵게, 스스로를 안정시킬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해보도록 하자.


이렇게 단순히 정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인가?

과연 나에 대해 재정의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전에도 지금처럼 말로만 혹은 글로는 재정의 해본 적이 있었다. 문제는 그때뿐이었다는 거다. 스스로 아무리 "난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정의해 봤자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불편한 사실만이 남을 뿐이었다. 진정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올지는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인정은 타인에게서 오는가?]


스스로 정의하는 걸로 이뤄질 수 없다면 결국 타인에게서 혹은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이래요 초짜처럼.


여전히 어렵고 난해하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당신은 무얼 하는 사람이요?"라고 물어본다면 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분명 과거에는 가능한 일이었다.


"뭐 하시는 분이에요?"

"회사 다닙니다."


이보다 명쾌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에서라면 어떤가?



상황 1)
"(딱 봐도 노는 것처럼 보이는데) 뭐 하는 분이시죠?"
"저 그게 음.. 사실 이런 것도 해보고 있고, 요론 것도 해보는 중이면서, 미래에는 이런 것도 해보려고 하고 하하."

상황 2)
"(딱 봐도 백수가 분명한데..) 뭐 하는 분이시죠?"
"집에서 놉니다."


원래는 [상황 1]의 화자가 되어 구차한 설명을 늘어뜨렸었다. 당장에 명쾌한 한 문장으로 답을 할 수 없으니 설명이 길어졌고, 어떻게든 상대방의 이해를 구하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던 결과다.


최근에는 [상황 2]에 가깝다. 말하는 나조차 납득이 되지 않는 설명을 타인에게 하는 일이 넌센스라는 걸 깨달았다. 차라리 정면돌파가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상황을 떠나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잃어버려서 생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불행하지는 않다. 단지 때에 따라 불편하고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스스로 칭찬을 하고 다니는 것과 타인의 칭송 사이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존재한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정체성의 재정립은 다소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글을 쓰는 중이다]. 결코 잘나서도 혹은 자랑의 목적 때문도 아니다. 하루하루 글을 쓰는 순간이 있기에 그래도 여전히 쓸모 있음을 어딘가의 누군가에게는 혹은 자신에게만은 보여주고 싶어서다. 가깝게는 가족에게 해당할 수도 있겠다.


생산을 해낸다는 것.


어찌 보면 크리에이터라고 정의 내렸던 그 순간부터 알 수 없는 [생산 강박]에 빠져버렸으려나? 끊임없이 존재를 증명하고 가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만이 남았다.


결국 내게 있어서 글은 [가치 증명의 수단]인가?

나의 글은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


나의 글이 나를 벗어나 타인을 향하기까지는 아직도 거리감이 존재하는 것 같다. 얼마큼이나 더 나에 대해 벗어나는 글을 써야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때까지는 계속 쓸 생각이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머리카락을 조금씩 밀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정립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겠지.


나에 대해 알아가는 일은 이렇듯 괴로움이 뒤따른다. 분석하다 보면 별 거 없는 사람임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연민을 품게 된다. 다시금 고민과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래서 하겠다고? 말겠다고?"


결론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결국 이 또한 선택의 일환일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대로 된 시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