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써 보는 이야기 17
[이는 나를 속이는 답변이다! 너는 분명 한 무제를 통쾌히 여기고 있을 텐데, 어째서 문제가 낫다고 하느냐?]
"아.. 아바마마? 아바마마 잘못했사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을 때 바뀐 현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몸을 간지럽히며 기어 다니는 촉감을 느끼게 하는 벌레부터 시작해, 타는 목마름이 느껴지는 것까지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착각이구나..'
며칠이나 흘러간 걸까. 어째서 이 질기고도 모진 목숨은 끝이 나질 않는가.
똑똑똑-
'오면 안 된다 이렀거늘..'
"아버님. 드셔 보시옵소서. 제가 틈으로 물을 흘려 보겠사오니 기운 차리셔야 하옵니다."
대답할 기운도 없었고, 대답해서도 안된다. 지금의 이 광경을 궁궐의 누군가는 분명 바라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스스로 물러서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아비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부정이다. 미안하구나.
"대답.. 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무탈하시기를 바라올 뿐입니다. 소자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면 얘기하시옵소서. 저는 아무렇지 않사옵니다."
'가거라.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다. 여기에 있으면 너 또한 나의 신세처럼 될 것이다. 나의 불행이 네게 전염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불행이 너를 잡아먹게..'
뒷 상상이 떠오르려는 걸 억지로 누른 채 머리를 하얗게 비워내려 노력했다. 차마 아이의 고통을 상상할 수 없었음이다. 아비로서 아이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상상으로조차 보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가보겠사옵니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하아..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가려움과 속이 찢어질 거 같은 아림이 느껴지는 걸 봐선 여전히 살아있긴 한 거 같은데.'
"죽었느냐?"
바스락-
"살아 있사옵니다."
잠깐의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이내 어두워졌다.
"허허. 목숨은 천명이라더니 맞는 말이로구나."
아버님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잘못했다고 뉘우친다고 빌면 풀어주실까?'
"하.. 하.."
그럴 리가. 이미 늦었다. 좋은 아비가 되기에도 훌륭한 세자의 역할을 하기에도 모든 걸 되돌리기엔 이미 한참을 늦어버린 것이다. 진작부터 기회가 있었을 텐데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나의 죽음은 필연이었다. 그것이 왕의 살아가는 방식임을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다. 아니지. 아들까지 살 수 있겠구나. 그래. 나 대신 너는 반드시 왕이 되거라. 그리고 깨달아라. 그 자리가 너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똑똑똑-
'얼마나 또 지났을까. 아들이 다시 온 게로구나.'
두들기는 소리 하나에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 아이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는 것만 같다.
"기대를 접어라.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죽어줘야겠다."
'아.. 버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똑똑한 아이이니 내 몇 마디 건네지 않았지만 알아듣더구나. 너의 목숨을 부지하게 만드는 것이 그 아이임을 내 알고 있다. 그래서 잘라내는 것이다. 이제는 편히 내려놓거라."
'그런가. 그렇구나. 하하. 이 숨이 빨리 끊어져야 모든 이가 평온에 이를 텐데.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살고 싶어 하는 내가 문제로구나.'
"승하하셨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임금이 무릎을 꿇었다. 모인 대신들이 왕의 황망해하는 모습을 차마 바라보지 못해 다들 고개를 떨구었다.
"경축드립니다!"
모두의 이목이 말을 내뱉은 이에게 쏠렸다.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좌중을 바라보며 이죽거릴 뿐이었다.
"이제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섰습니다. 경축드립니다!"
다시 한번 그의 말이 이어진 후 초점을 잃었던 왕도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자저하의 육신이 사라졌사옵니다!"
"무.. 무어라?! 그런 일이. 그런 일이 생길 수 없지 않으냐!!"
대경한 표정을 지으며 왕의 호통이 이어지자 황망하다는 듯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내.. 내 직접 보겠다! 부수어라!"
"예!"
콰지직- 콰득-
생각보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탓에 뒤주는 한참의 도끼질 끝에 해체되었다. 그 안에 응당 있어야 할 시체 상태의 아들은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전하!!!!!!"
"전하!!!!!!"
놀란 대신들의 목소리가 궁에 울려 퍼졌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보는 왕의 흔들리는 눈빛이 불안하게 좌중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버님.. 아들아.."
어찌 된 일인지 가벼운 상태의 몸이 되어 있었다. 분명 뒤주 속에 갇혀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꺼낸 것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눈앞에 대신들과 주저앉은 임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저 멀리서 눈물을 훔치는 아이의 모습까지.
'죽었구나.'
체념이 찾아왔다.
"가십시다."
올게 왔구나. 말로만 듣던 사자라는 놈이렸다. 내 순순히 따라가지.
"무얼 하시는 게요?"
"망자를 데려가기 위해 오신 분 아니십니까?"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나를 부른 건 그대요. 애타게 나를 찾지 않으셨소?"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화르륵 소리와 함께 타오르는 불길에 둘러쌓인 남자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뉘.. 뉘시오? 지금 내가 죽은 게 아니란 말이오? 분명 방금 전까지 뒤주 속에 있었는데."
"만져보시오."
무엇을..? 순간 홀린 듯 몸을 만져봤다. 촉감이 느껴졌다. 심장 그래 심장 소리가 들리는가? 맥이 뛰고 있었다. 분명 살아있구나.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계약서를 가져왔으니 읽어보고 이름을 쓰면 되오. 그대가 바라는 생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으니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