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써 보는 이야기 16
"넌 왜 맨날 옷 똑같이 입냐?"
혜지가 무심코 얘기한 말이었을 뿐인데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나도 모르게 발끈해 버렸다.
"아냐! 넌 무슨 애가 말을 그렇게 하냐!"
"내가 뭘.. 그냥 입고 있는 옷이 잘 안 바뀌길래 물어본 건데."
울먹거리는 혜지의 주위로 여자애들이 몰리기 시작하며 그녀에겐 위로를 내게는 경멸의 눈빛이 쏟아졌다. 뜨겁다 못해 따가운 시선을 받자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등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딩동댕동-
'종소리가 살렸다.'
수업시간임을 알리는 종소리 덕에 째려보던 여자애들은 자리로 돌아갔고 눈에 보일 정도로 흐느끼던 혜지의 몸짓도 잦아들었다.
입고 있던 옷의 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아봤다. 살짝 쿰쿰하고 꼬릿 한 냄새가 올라와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러졌다.
'생각해 보니 똑같은 츄리닝을 일주일째 입었구나. 혹시 냄새가 나서 얘기 꺼낸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또 흥건하게 등이 젖기 시작했다. 빨리 집에 가서 옷을 빨아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새 옷을 좀 사달라고 해야겠다.
어떻게 수업이 끝났는지도 모르게 끝나자마자 황급히 교실을 벗어났다. 가만히 있다간 혜지와 그의 친구들이 내게 한소리를 할 것만 같았다. 사실 교내에서 내게 쏠리는 시선과 관심은 크게 없는 편인데도 오늘 있었던 일로 혹시나 주목받는 건 원치 않았다. 날듯이 집까지 뛰어와 문을 열었다.
"벌써 왔니?"
"네. 엄마."
"응? 무슨 할 말 있어?"
"나 옷 좀 사주면 안 될까?"
"왜.. 갑자기?"
"아니. 생각해 보니까 맨날 똑같은 옷만 입는 거 같아서. 나도 새 옷 좀 입고 싶어. 안될까요?"
"생각 좀 해보자."
"맨날 생각만 한대! 츄리닝 벌써 일주일이나 입어서 냄새난다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크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런 내 모습에 엄마의 표정도 심상치 않아 졌다.
"그렇게 됐나 벌써? 누가 뭐라고 한 거야?"
"아..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싫어서 그래."
엄마는 역시 예리했다.
'사실 누가 뭐라고 그래서 그런 거 맞아요.'라고는 차마 말을 못 하겠다.
"그래. 이번달 생활비가 좀 부족하긴 한데.. 이따 시장 가보자."
"정말? 아 근데 시장 말고, 매장으로 가면 안 돼? 봐둔 거 있단 말이야."
작은 한숨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알았어. 아빠한테 한번 얘기 좀 해볼게."
"꼭이다 알았지? 나 내일 이거 안 입는다?"
"알았으니까 벗어. 빨래해 줄게."
'오랜만에 시내로 나오니 기분도 전환되고 얼마나 좋아? 진작에 이렇게 나와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랬어야 하는데 맨날 우중충하게 어두운 집에나 있어서 되겠냐고.'
엄마의 표정은 어둡다 못해 새카맣게 변해있었다. 보통 걱정이 있을 때 짓는 표정인데. 혹시 아빠한테 한소리 들었나? 분위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알맞게 찜해둔 매장이 나타났다.
"저기야 저기! 저기서 사줘요."
"저기라고? 비싸.. 아니다 가보자."
신이 나서 매장에 들어가 이리저리 옷을 둘러봤다. 깔끔한 매장 안에는 내 또래의 애들이 엄마 손을 붙잡고 와있었다.
"나 이거 사 줘요."
"그래라. 신발은 필요 없고? 신발도 하나 사."
옆의 아이는 상기된 표정으로 신발도 고르기 시작했다. 순간 너무나 부러웠다. 문득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을 쳐다봤는데 꼬질꼬질하게 구겨져 있어서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옷을 고르려 쳐다봤는데 하필 눈앞에 전신거울이 있었다. 그곳에 비친 나와 엄마의 모습을 보자 한 없이 초라해졌다.
"엄마."
"응? 골랐어?"
"나가자.."
"왜? 여기서 산다더니?"
"아니야. 너무 비싸. 나가자."
"사줄게. 사주려고 아빠 허락도 받아왔는데."
"아니에요. 다른 데 가서 고를게."
옷도 제대로 보지 않고 도망치듯 엄마만 뒤에 둔 채 밖으로 나와버렸다. 마음에 드는 옷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슬쩍 가격부터 확인해 보니 말도 안 되게 비쌌다. 게다가 거울에 비친 엄마의 표정은 그야말로 시한폭탄이라도 들고 있는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내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엄마한테 어떻게 비싼 옷을 사달라고 한단 말인가.
"괜찮겠어?"
"안 괜찮아."
"다시 가자. 사줄게.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거야! 안 괜찮잖아!"
"뭐? 너.. 지금 엄마한테 화내는 거야? 어디서 버릇없이."
"그래. 나 버릇없어! 그리고 이 옷 맘에도 안 들어. 그런데 어떡해. 우리 집 형편이 뻔하잖아. 가난하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 몇 명이 우리를 쳐다봤다. 엄마는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다시 또 안절부절못하면서 황급히 내 팔을 세게 부여잡고 골목 어귀로 들어갔다.
"왜 그러는데? 너 엄마 못살게 굴고 싶어서 그런 거야?"
"몰라. 다 맘에 안 들어. 날 왜 낳은 거야 대체!"
짝-
예상했다. 이렇게 말하면 엄마가 때릴 줄 알았다. 한 대 맞으면 마음이 좀 편해질 거 같았다. 눈앞에서 엄마는 충혈된 눈으로 씩씩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집까지는 한마디 대화 없이 멀찍이 떨어져서 걸어왔다. 아무 생각도 들진 않았다. 옷을 사긴 했는데 맘에 들지도 않고 기껏 소리를 지르긴 했는데 속이 시원하지도 않았다.
"쫄면 먹고 갈까?"
못 들은 척했다. 누가 언제 쫄면 먹겠대?
"튀김도 파는데. 먹자."
무슨 감정에선지 휙 돌아서서는 분식집으로 말없이 걸어 들어갔다.
"쫄면 하나랑 튀김 1인분이랑 떡볶이 1인분 주세요."
주문을 마칠 때까지 애꿎은 분식집 테이블만 눈을 흘기며 쳐다봤다. 눈이 몰리면서 따가운 느낌까지 들었지만 지금의 감정을 함부로 풀진 않을 생각이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다시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엄마는 굳이 내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흥! 나도 말 안 해.'
배가 고프긴 했다. 음식이 나오자 저절로 입에 침이 고이며 빨리 먹고 싶어졌다.
"먹자."
"에."
어중간한 대답 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었다. 일부러 화나 있다는 걸 더 보여주고 싶어서 과장되게 입에 쑤셔 넣었다.
"옷 새로 샀네?"
"아닌데 있던 옷이야. 그냥 잘 안 입던 거야."
"그래? 그런데 못 보던 브랜드네? 이건 어디 거야?"
"됐어! 뭘 그리 관심을 가지고 그래."
"넌 애가 왜 자꾸 못되게 그러냐! 너랑 안 놀아."
'언제 너보고 놀아 달란 적 있어? 귀찮게 먼저 대화걸 땐 언제고.'
모든 게 맘에 들지 않는다. 옷도 혜지도 엄마도 학교도 세상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재미도 없다.
"미안해. 놀리려던 건 아니고.. 그냥 해본 말이었어. 사과할게."
"뭐?"
"기분 풀라고. 이따 분식집이나 갈래? 내가 화해의 의미로 떡볶이 살게."
"..."
"가는 거다? 그리고 옷 잘 어울려."
"뭐래."
툴툴대며 튀어나온 말과 달리 고개를 숙인 채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췄다.
'뭐.. 사과한다고 하는데 안 받을 이유는 없잖아? 안 그래?'
무채색이었던 마음에 약간의 색조가 입혀지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