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써 보는 이야기 15
'저것이 그토록 네로가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 그림이었나?'
"일어나 네로‼️"
하지만 웃으며 누워 있는 가엾은 네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컹컹 짖어보기도 하고 핥아보기도 했건만, 차갑게 식어버린 육체를 빠져나간 영혼은 돌아올 생각이 없는 듯하다.
"컹컹!"
하늘을 향해 울분을 토해내듯 짖어봤지만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약하고 착한 나의 주인 네로.. 할아버지가 내게 부탁했던 마지막 유언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는데. 미안해.'
왠지 모르게 나의 눈도 감기기 시작했다. 한때는 우유수레를 하루에 몇 번씩 끌어도 힘들지 않았던 강철체력이었는데.
'나도 이제 끝인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에 네로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우리 다음 생이 있다면 거기서 만나자.
...
...
"일어나랏 1872번‼️ 언제까지 누워 있을 셈이냐!"
"끄응.."
'뭐지? 죽은 게 아니었나?'
"뭘 꾸물거렷! 빨리빨리 움직여랏.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이다. 특별히 너의 행적을 가엾이 여긴 견신님의 은혜로움에 감사하도록. 이해했다면 [멍x5]을 제창하도록!"
"멍..? 멍! 멍. 멍 멍!"
"좋았어! 다음!"
머릿속에 물음표가 잔뜩 생겼지만 이해할 틈도 없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볍잖아?!'
분명 차갑고 무기력하게 식어가는 육체의 고단함을 느꼈던 게 불과 몇 분 전 같은데.
"이리로 오세요. 파트라슈님. 고생 많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아.. 네네."
주위를 둘러봐도 여기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다.
"헉! 어떻게 된 거죠?"
"하하. 흑백이 아닌 다양한 색을 보실 수 있게 되셨죠? 처음 오시는 분마다 많이들 놀래시더라고요. 차차 익숙해지실 거예요."
처음 보는 화려한 색상. 이렇게나 수많은 색이 존재했었다니. 문득 고개를 떨궈 바닥을 살펴보니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마치 이 방향으로 쫓아 걸으라는 듯. 그러고 보니 네로는 어디 있지?
"저기.."
"아. 과거는 잊으세요. 현재에만 집중하시길. 주어진 길을 쫓아가기도 버거우실 겁니다."
마치 독심술이라도 펼치는 듯한 이름 모를 견에게서 위풍당당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아까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새까맣고 윤기 나는 털이 잘 관리된 견종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터벅터벅-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다 보니 좁디좁은 터널이 나타났다. 그 위에는 선명하게 [1872]라는 불렸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아.. 안돼 이 주인놈아! 내.. 이럴 줄 알았다. 늙은 주제에 맨날 권유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더니. 이 사달이 날 줄 알았다 이 말이야.'
"일어나 할아범! 이러고 자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나의 개소리에 일어날 몸뚱이였다면 진작에 일어나도 몇 백번 일어났겠지만, 노구의 주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 사이 불길은 점점 퍼지기 시작해 뜨거운 열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황급히 주위를 살펴봤다.
'물!?'
밑에는 개울가가 있었다. 하지만 할아범이 누운 이곳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하지만 지체할 수 없다. 한시가 급한 일이니까. 본능적으로 개울가로 달려가 몸을 적셨다.
'춥구만. 하아..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
술만 안 마신다면 저 늙은이는 정말로 좋은 주인이다. 문득 어릴 때부터 내게 해줬던 따스한 행동들이 스쳐 지나갔다. 본인은 굶더라도 내 먹을거리를 챙겨주기도 했던 모습까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의 부탁도 있었다.
"오수야. 내가 먼저 가거든.. 할아범 좀 잘 부탁한다. 술 좀 그만 마시게 하고."
멍멍 소리 밖에 내뱉을 수 없는 구강구조가 한스러웠다. 할머니의 마지막 길만큼은 편안히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마음을 담아 짖어대는 것.
"하하.. 녀석. 마치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듯 대답하는구나. 기특한 녀석.."
흠뻑 젖은 몸으로 바깥에 나오자 제법 쌀쌀했다. 하지만 할아범의 주위로 불길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있는 힘껏 달려 불 앞으로 달려갔다.
화르르르르륵-
화마의 거센 저항 앞에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몇 번의 짖음을 토해낸 후 불속으로 굴렀다.
'뜨거워..'
몇 번을 반복했을까. 개울가에 몸을 담가도 더 이상 차가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몸이 너무 무겁다. 그래도 해야 한다.
'이제 불길이 얼마 남지 않았어. 조금만 더.'
치지지직-
'꺼.. 껐다! 하하.. 내가 해냈어. 내가 해냈다고. 봐 할아범. 내가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이 세계에서의 마지막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기까지만 보살펴 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힘겹게 눈을 떠 마지막으로 술 취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이제 내가 떠나고 나면 누가 이 불쌍한 늙은이 곁에 있어주려나. 하지만 세상을 떠나는 이가 걱정할 몫은 거기까지만 허락될 뿐이었다.
...
...
"1928번‼️ 정신 차렸으면 일어낫!"
"끼이잉..."
"엄살 부리지 말고 당장 일어나서 앞으로 갓!"
알 수 없는 명령소리에 눈을 번쩍 뜨자, 무지개 빛의 처음 보는 공간이 나타났다.
'자.. 잠깐만 무지개?'
"이..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색.. 색깔이 보여요. 여기가 어디예요?"
"말 많은 놈이군. 설명하고 내보내도록해."
"이리로 오세요. 오수의 개님."
"예? 제 이름이 어째서.."
"번호로 불러랏!"
"1928번 님. 이쪽으로."
"컹컹‼️"
"왕왕!"
"으르르르르르르.."
처음 만나는 개들끼리 낯섦을 깨기 위해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자! 지금부터 제1회 천하제일명견대회를 열겠습니다!"
알 수 없는 장내 소개멘트가 넓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일순간 핀조명이 하나씩 집합해 있는 개들을 향해 비추자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게임의 룰은 심어 놓은 기억 속에서 떠올리시면 됩니다. 자아~ 이제 시작하기 5분 전입니다! 준비하시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으시기를. 살아남는 견에게는 특별한 혜택이 주어집니다. 자 그럼~ 시이이이이작‼️'
[이미지 출처 - 후지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