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탕트(dilettante)

180 걸음

by 고성프리맨

"너 덕후야?"


마이너 한 문화를 좋아하면 배척받던 시절. 덕후는 별로 좋지 않은 뜻으로 사용되었었다. 좋아하는 특정 카테고리에 몰입하고 빠져드는 것이 희화화되거나 주변에 우려를 만들어냈다.


'넌 나와 달라. 평범한 사람은 이런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평범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범의 정의는 누가 내렸을까?


평범의 범주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되도록이면 마이너 한 취향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이라도 가진양,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취하는 행동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


아무리 숨겨도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을 숨길 수는 없는 법이었을까?

소위 [아싸] 혹은 [덕후]로 분류되는 사람과도 가까워졌다. 되도록이면 성향을 드러내진 않으려 했기에 내 지인 구성은 보통 7:3 정도로 [일반인과 덕후인(?)]의 비율이었다. 나름 기운을 숨긴 보람이 있다고나 할까.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우리끼리(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 있을 때와, 일반인이 섞여 있을 때의 행동이 달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박쥐 같은 인간의 표본이 아니었나 싶다. 말은 안 했어도 나의 행동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이도 있지는 않았을까?


-그러니까 덕후였다는 거잖아요? 뭘 그리 빙빙 돌리시는지?


"...... 흠"


성향이라는 게 100% 딱 정해지는 게 아니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7:3의 비율만큼 평범과 덕후의 사이에서 지냈다에 가깝다. 진짜 덕후의 입장에서 보면 나 같은 사람은 그냥 패션덕후 또는 흉내만 내는 정도로 보일 뿐이다.


"아니야. 오빠 원래부터 좀 이상했어."

"어허. 사람한테 이상하다가 뭡니까. 엄연히 취향의 한 종류인 것을!"


굳이 비율의 조정을 언급할 정도로 중요사항은 아니니 일상의 대화로써 대충 짐작하며 넘어가 주시기를.




딜레탕트(dilettante)

: 예술이나 학문, 특히 음악 등의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는 아니지만 열렬히 애호하는 경향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예술이나 학문에서 하나의 정립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이것저것 즐기는 사람도 이 범주에 속하며 쉽게 말해 프로가 아닌 OO덕후와 비슷하다. - 또무위키


우연히 알게 된 용어였다.


'오호라? 있어 보이는걸?'


뭔진 몰라도 덕후라는 변질된 용어보다 듣기에도 좋고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난 애니 딜레탕트야."

"안녕? 난 건프라 딜레탕트야."


덕후에 비해 입에 착 감기는 맛은 덜하지만 그래도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 호기심 정도는 유발할 수 있으렷다.


입에 담기도 부끄럽지만 한때 프로그래머였던 입장에서 비슷한 개념이 떠올랐다.


[POJO]


-포조? 이게 뭐조?


Plain Old Java Object.


-누가 풀텍스트가 궁금하답디까?


굳이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지만 꿋꿋이 해석을 해보자면 [오래된 방식의 간단한 자바 오브젝트]라 할 수 있겠다.


뭐 언어로써의 좋고 나쁘고 구식이고 신식이고를 떠나 위에 언급한 [POJO]의 개념은 해석된 의미처럼 원래부터 존재하던 개념이었다. 단지 [POJO]라고 그럴싸한 이름을 부여하자, 있어 보이는 효과가 발생했고,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도 능력의 증강 없는 기분만 좋아지는 버프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실 별 거 없이 새로이 디자인된 명명 하나만으로도 받아들이는 측의 느낌이 달라진다는 얘기.

본질은 그대로이나 갑자기 힙해지는 효과가 덤으로 생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니 강한 태클을 들어오실 생각이었다면 잠시만 멈춰주시길.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나니 (전도서 1:9)


놀랍고 기발하고 새로워 보이는 것을 설명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가끔 인간은 발명보다는 [발견]에 특화되어 있지는 않은가?라는 망상을 해보기도 한다.


유심히 살펴보고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결코 그것은 새로운 것도 상식을 뒤집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태초부터 있어왔고 그것을 칭하는 이름만 바뀌는 것은 아닐까?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말고 쓸 말 없으면 정리하쇼.


"......"


오늘부터 딜레탕트가 되어보기로 마음먹은 1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을 말해봤달까.

[덕후->딜레탕트]


-덕후였다는 걸 드디어 실토하는군.


"30%의 성향이 그렇다니까... 말귀를 잘 못 알아들으시나 본데-"


뭐, 기분이 나쁘거나 그래서가 아니다. 40대가 되어서 크게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오히려 백수보다 덕후로 불리는 게 더 낫지 않나? (둘 다 별로인가...)


사실 세상은 내가 덕후든 딜레탕트든 백수든 관심이 없다. 오히려 관심받고 싶어 이리저리 몸부림치는 건 나지, 세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제로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을까?


예전에 빠져있던 분야와 달리 최근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들으면 비웃을 수도 있을 텐데.


-어차피 말할 거면서.


사실 근질근질했다.

최근 난 [인류]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 곱게 미칠 것이지.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글을 쓰면서 깨달았는데 나에서 시작되는 얘기도, 가상의 인물로 쓰는 소설도, 모두가 지향하는 게 결국은 사람에 관한 내용이라는 점. 누구보다 관심 없다고 생각했던 주제였건만, 알고 보니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달까?


그렇다고 감히 [인류애]를 들먹이려는 건 아니다. 그럴 깜냥도 되지 않는다.


여하튼 난 오늘부터 [인류 딜레탕트]다.

내가 쓰는 이야기가 인류의 이야기를 쓰는 한 나의 인간사 덕질이 계속되리라 믿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