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확행? 소확행이라도 좋아.

181 걸음

by 고성프리맨

초콜릿이 알알이 박힌 칙촉 한 개와 커피 한잔의 여유.

어느 순간부터 소소하게 자리 잡은 나만의 행복이다.


멍하거나- 기분이 별로거나- 혹은 우울해질 때-


입에 단 게 들어오면 기분이 나아진다.

비록 몸에는 좋지 않겠지만, 나의 작은 사치를 용서하렴 몸아.


생각해 보면 [소소함]이 주는 행복이 꽤 존재한다. 그래서 [소확행]이라는 말도 생겨난 것일 테지만.

여유 부리고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자 작고 귀여운 것들에 점점 관심이 커진다.


'이래서 나이 들면 꽃이나 동물에도 그토록 관심이 생기는 것인가?'


한때는 큰 욕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었는데, 반대로 힘이 빠져 버린 건 아닐까?


간혹 SNS에서 예전 동료의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볼 때면 잊고 지냈던 욕망이 슬그머니 꿈틀거릴 때도 있다. 하지만 꿈틀거림도 잠시, '아...... 이제 내 세상은 저곳과는 다르지.'라며 과거의 꿈을 애써 떨쳐낸다.


"오빠는 회사 그만둔 지가 언젠대 아직도 옛날 타령이야? 그럴 거면 차라리 회사 다시 구해."


아내는 T가 확실하다. 내 비록 MBTI 신봉자는 아니지만 약간의 감성에 취하는 것조차 흥을 깨버리는 그녀는 확신의 T가 맞다. 그래도 큰 도움이 되긴 했다.


"아냐. 난 지금이 좋아."

"난 오빠가 돈 벌던 그때가 더 좋아 ^^"

"영-차!"


무거운 몸을 일으켜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어디 가려고? 갈 데도 없잖아 ^^"

"화장실?"


정말로 갈 곳이 없었기에 나를 반겨주는 나만의 공간, 휴식처 [화장실]에 들어갔다.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도 귀찮고, 어딜 들어가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니 궁색하지만 잠시 피신처로 택한 곳일 뿐이다.


"혹시라도 40대에 회사 퇴직할 생각이면 잠시 제 모습 감상 좀 하고 가실게요."


이보다 현실적인 조언이 있을까? 혹시라도 퇴직 후 백수 생활을 지속하려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법]에 대해 필히 연구해야 한다. 추가로 [돈을 벌 수 있는 법]에 대해서도 마스터하길 바란다.


-전후가 바뀐 거 아닌가? [1. 돈] 다음으로 [2. 시간] 아니야?


이 부분에 대해선 해줄 말이 딱히 없다. 돈과 시간의 순서를 떠나 둘 다 제대로 활용 못하는 까닭이다. 솔직히 타의모범은커녕 내 한 몸 건사하기 벅차하는 중년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냥 내 이야기를 시트콤 혹은 노잼 드라마 정도로 바라봐주면 좋겠다.


-흠...... 오늘따라 왜 이리 글루미하고 시니컬하신지?


"사실은 그게-"




영롱하도다 PS5!


이 녀석 때문이다.


-???


솔직히 말해서 PS5를 사더라도 활용은커녕 방구석 한편에 방치될 걸 뻔히 알고 있다. 그런데 자꾸 눈에 밟힌다. 그야말로 갑작스러운 [소비욕]의 발동.


필요도 없는데 가지고 싶은 이 마음을 정리해 보면......


[가짜 소비]


즉, 마음이 헛헛하기에 이것저것 불필요한 소비로 빈 곳을 채우려 한다 이 말씀되시겠다. 말씀이라고 높일 필요도 없을 텐데.


[시간을 잘 보내는 법]에 대해서 위에 언급했었다. 지금 내가 고민하고 방황하는 이유는 '어떻게 해야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거지???'에 대한 답을 못 찾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자꾸만 [향락]을 찾고 있다. 그런 향락 중 가장 접근성이 편하고 쉬운 건 [소비] 일 터.


'PS5를 산다면 나의 헛헛한 마음이 채워질거야. 그리고 아직도 못해본 [라오어 파트 1]부터 제대로 즐기면 얼마나 창작에 도움이 되겠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질러버리면 편해질 거 같은 이 마음을 어찌하면 좋을꼬. 물론 아내에겐 털어놓지 않았다. 돌아올 대답이 뻔했기 때문이다.


[똑. 똑. 똑.]


"......"

"오빠... 미안해.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지?"


아내는 모른다. 내가 뭐 때문에 지금 화장실에 처박혀 있는지. 그리고 차마 솔직히 말을 못 꺼내겠다.


"... 흠.. 흠.. 배가 아파서."

"...... 나 때문이구나.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해서 그만."


이쯤에서 '아니야.'라고 한마디만 해도 좋았을 텐데, 두뇌를 풀가동해 역전의 기회로 삼아보려 했다.


"(사연 있어 보이는 목소리로) 아니야. 다 나 때문이지. 속이 좀 좋지 않아서, 잠시 후에 나갈게."

"알았어. 오래 있지 말고. 혹시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외식이라도 할까?"


'뭐! 외식?'


"으.. 응. 고마워. 외식할 기분은 아닌데...."

"그래? 그럼 그냥 집에서-"

"아니 그래도 말 꺼낸 정성이 있으니 메뉴는 생각해 볼게."


닫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우리. 이럴 거면 그냥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지만, 그래도 벽 하나가 주는 느낌이라는 게 있으니.


머릿속을 꽉 채웠던 [PS5]에 대한 생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새로운 소비처 [외식]이 떠올랐다. 평소 긴축재정을 하며 최대한 집에서 해 먹자고 얘기하는 아내의 말은 전부 맞는 말이었기에, 지금처럼 아내가 먼저 외식제안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기회다.


서운했던 감정은 어느새 뒤로, 화장실에 들어온 이유도 흐릿해져 갈 즈음, 드디어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올랐다‼️


벌컥-


"우리 그럼 ooo 먹으러 갈까?"


아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그런 표정에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했지만 문은 이미 열려 버렸다.


"뻔하지 뻔해. 이런 식으로 꼬셔내면 나올 거라 생각했었는데 역시 쯧쯧. 외식은 개뿔. 집에서 밥이나 먹어."

"......"

"다시 또 화장실 들어가려고? 내 그 꼴은 못 보지. 긴말 안 할게. 집에서 그냥 먹자? ok?"

"......"


시간이 지나 자동 구매확정이 되어버리듯, 침묵이 길어지자 아내는 당연한 듯 [YES]로 받아들였다. 10년 이상 같이 산 보람이 있는지 이제는 꽤나 [남편 사용법]에 익숙해진 것이다.


[PS5 -> 외식 -> 집밥]으로 이어지는 소비의 축소. 실로 아내는 대단한 성과를 이뤄냈다. 자칫 백만 원에 육박하는 돈을 잃어버릴 뻔했던 걸 축소시켜 재료비와 인건비로 틀어막는 업적을 이뤄냈으니, 다시 한번 아내에게 경외심을 보낼 수밖에.


"행복한 줄 알아 인간아! 밥도 못 얻어먹고 사는 남편 많다고."


맞는 말이다. PS5가 다 무슨 소용이냐. 지금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해 밥 먹고 대화 나누는 이게 행복인 것을. 그래도 자꾸만 눈에 밟히는 PS5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지금은 일단 후퇴하겠지만, 나중을 기약하자. 기회는 언젠가 다시 오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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