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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같이 살아온 시간보다 따로 살아온 세월이 훨씬 긴데, 갑자기 서로의 취향을 맞출 수 있는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내게 맞춰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그것은 욕심이다. 알고 있지만 자꾸 욕심이 생기는 걸.
각자의 회사생활을 할 때는 몰랐는데, 같이 붙어있는 시간이 늘고 협업을 할 일이 생기자 내재된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보통은 아내 쪽에서 문제 삼는 게 아닌, 내 쪽에서 문제 삼는 일이 많았다.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였는데, 어찌하여 맨날 나를 그리 쥐 잡듯이 잡으려 하나 몰러. 다른 사람들은 아마 모를 거야. 내가 이렇게 쥐어 사는 거."
"별로 어려운 게 없잖아. 내가 바라는 건 딱 2개라고."
1. 일정 공유
2. 약속 엄수
"그게 바로 사람을 잡는다 이 말이야!"
정녕, 그러한가?
나의 바람은 단지 위에 쓴 두 가지뿐인 것을.
"그 과정을 공개해 봐 어디."
"흥. 못할 줄 알고?!"
나
[일정 공유]라 함은 같이 일하는 데 있어서 기본 of 기본 되시겠다.
비록 같이 일하는 인원은 아내와 나, 단둘이서만 이뤄진 조촐한 파티지만 나는 함께 알아야 할 일정에 대해서만큼은 필히 [공유 캘린더]에 기재하고 초대하는 걸 원칙으로 정했다.
평소의 난 주로 집에만 있기 때문에 특별히 외출할 일이 없지만, 어쩌다 외출을 하게 되면 캘린더에 일정을 만들고 아내를 초대한다. 내가 우리 집에서 맡은 직무는 [운전기사]이기 때문에 내가 차를 가지고 어딘가로 사라진다면 가족의 발이 묶이기 때문이다.
또한 특별하지 않더라도 세금 처리라던가 공과금을 내야 하는 일, 혹은 서류 작업, 체험단 일정 조율, 병원 방문, 해야 할 일에 대한 계획 등,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최대한 공유를 하려 한다. 비록 아내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것까지도.
-설마...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씻는 행위도 공유하는 거 아니죠?
대체 나를 뭘로 보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화자는 결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 단지 조금 유난을 떠는 걸 좋아할 따름이랄까.
-아니 유난 떤다는 걸 본인도 잘 아는구만!
"......"
여하튼 다 모르겠고, 난 공유하며 살 거다. 함께 알아야 할 대소사에 대해서 공유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아내
내 남편은 살짝 미쳤다.
아무래도 내가 남자 고르는 눈이 잘못되었던 게 분명해.
회사 다닐 때 몇 시간씩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건, 단지 일을 좋아해서였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때 습관을 들먹이며 나를 이토록 괴롭힐 줄이야.
마음 같아선 "야 이 XXX야! 날 좀 냅둬줘!"라고 뒤엎어 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나는 심성이 고운 여자니까 참아보련다.
솔직히 저런 이상한 성격의 남자를 누가 데리고 살아준단 말인가?
"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디 중고로 내놓고 팔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처분해 버리고 싶으나, 살아온 정을 봐서 내가 까짓 거 [일정 공유] 하는 거 맞춰주면 될 거 아니야!
나
시간을 정했으면 지켜야 하는 법.
어째서 아내는 내가 캘린더에 잔뜩 생성해 놓은 일정의 시간을 숨 쉬듯이 까먹거나 무시해 버리는가.
"아니 지가 가장이면 전부야?"
-어. 가장이 전부임.
그렇다면 할 말은 없긴 하다. 이게 다 내가 백수가 된 탓이다. 어쨌건 백수여도 난 시간 잘 지키는 백수다. 될 수 있으면 지키지 않을 약속은 안 하려는 주의.
"오빠. 그러니까 아예 약속이 없잖아, 안 그래? 나가서 누구라도 좀 만나고 다녀 제발! 나 좀 그만 닦달하고!"
왜 그러나. 우리 둘이서 알콩달콩 약속 잘 지키면서 살면 되는 것을. 그거 하나를 못해줘서.
"난 글렀어. 오빠의 기준치를 맞춰줄 수 있는 여자를 찾아봐."
아니다. 난 믿는다.
아내는 내 눈높이를 충분히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여자다.
"벌써 떨리는구만...^^"
아내
내가 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다.
집에 오면 쓰레기도 버려야 해, 설거지도 해야 해, 아이 공부도 시켜야 해, 돈도 벌어야 해, 운전 빼고는 다하는 만능 일꾼이다. 솔직히 우리 집에서 '내'가 빠진다면 집구석이 잘도 돌아가겄다.
"아니 오빠 집안일 좀 시켜. 뭐 하는 거야?"
"주0아. 안 시켜본 게 아니야. 시키면 맨날 디스크 올라온다고 드러눕기 바빠. 차라리 그 꼴 안보는 게 나. 진짜 [오내미꼴]이라고 외치고 싶다."
"......"
오내미꼴 - "오빠 내 미치는 꼴 보고 싶나!" / 형내미꼴 밈에서 기출변형
아무튼 그러다 보면 정신이 없다. 몸이 열개면 좋겠다. 각각 하나씩 분리시켜서 일을 시켜야 이놈의 집구석을 돌아가게 유지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런데 저 인간이 아까부터 뭐 하는 거지?
"야! 너 왜 벌써 패딩 입었어! 나 아직 아무것도 준비 안 했는데 진짜!"
"약속 시간이 다되었소. 이제 나가야 함."
"아니 본인만 준비 다하면 끝난 거야?"
"약속 시간은 지키라고 있는 법 아니겠소. 그것이 군자의 도리."
"진짜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약속⎯"
"한 마디만 더 지껄여봐."
"......"
진짜 끝을 봐야지만 입을 다무는 저 인간이 얄미울 따름이다.
결국 우리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애초에 좁혀지지 않는 게 당연한데, 좁히려 했던 것부터가 문제라면 문제.
-아니, 이 양반아! 요즘 세상에 가사 분담은 기본인데 기본도 안 지키면서!
구질구질하게 변명할 거리가 없는 건 아니나, 그것은 펀하지도 쿨하지도 섹시하지도 않으니 입을 다물겠다.
대신 손가락은 움직이겠다.
나도 알고 있다. 사실 난 문제가 많은 남편이다. 반면 문제가 별로 없는 남편이기도 하다. 말장난 같이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속을 뒤집어 놓다가도, 또 어떤 면에서는 아내의 니즈를 충실히 챙겨준다.
"난 오빠가 담배 안 피고, 술도 안 마셔서 좋아." 라거나,
"오빠가 친구가 없어서 참 좋아." 도 있고,
"오빠는 진짜 불효자야. 그게 너무 맘에 들어." 같은 것도 있는데,
왜 쓰면 쓸수록 점점 별로지?
여하튼 다른 사람끼리 "어디 한번 잘 살아봅세." 라며 결혼 서약을 맺은 지도 10년이 되었는데, 이쯤 하면 이제 반복되는 다툼이나 다름 정도는 넘길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앞으로 아내와의 관계 개선에 있어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를 이야기들을 캘린더에는 공유할 수 없으니 아내 몰래 [이 공간]에 슬그머니 올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