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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살 좋은 남편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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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40대가 되긴 됐구나.'란 생각이 확실히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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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아내폰으로 장모님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 엄마. 왜애?"

[별일 없지?]

"응. 왜 엄마는 별 일 있어?"

[아니 외할머니가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어-]


내가 직접적으로 들은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옆에서 계속 듣고 있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서 [건강] 그것도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지는 걸 보며,

40대가 됐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결혼 전 내가 꿈꾸던 사위의 모습은 드라마 속 넉살 좋은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일단 무엇보다 내가 그다지 넉살이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뭐 오빠만 그런가. 대다수의 남편이 그렇겠지."


이렇게라도 말해주는 아내한테는 고마울 따름이다.

오히려 지금은 장인어른과는 만나서 별 말을 나누지도 않게 되었다.

기껏해야 근황 토크로 5분 남짓 대화하던가.

만나 뵐 때마다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나마 장모님하고는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 얘기를 좀 나누곤 하는데, 그렇다고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진 않는다. 그것이 사위로서 나의 최대치다.


형님 하고도 마찬가지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시면 만나 뵙는데, 역시나 속 깊은 대화까지 나누기엔 다소 무리가 존재한다.


'잠깐만... 이 정도면 그냥 내가 문제인 거 아니야?'


뭐 넉살 좋지 못한 게 문제일지까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쉬움은 존재한다.




유일하게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아내]다.

이 경우에만 흥이 올라 몇 시간이고 얘기를 할 수 있게 되는데, 반대로 아내가 그런 나의 텐션을 따라오지 못한다.


"하아암-"

"졸려? 얘기가 재미없지? 그만할까?"

"아니야. 계속해. 흐아아암-"


계속 얘기하라는 사람의 태도로는 보이지 않는데 '기분 탓이겠지?'

나는 눈치 없이 다시 또 얘기에 얘기를 보탰다.

아마 그렇게 떠들어 댄 이야기들을 글로 썼으면 몇 편 정도는 더 썼을지도 모르겠다.


"흐아아아아아암!"


아까의 하품보다도 한층 더 격렬한 형태로 소리화되었다.

이쯤 되면 [제발 들어가서 잠 좀 자게 해 줘!]에 가깝다.

하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다시 내 얘기에 집중.


"자자! 얼마 안 남았으니 집중하시죠!"

"아... 난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내가 다 하는데 잠도 맘대로 못 자? 이게 가정이야?!"

"...... 자러 갈까?"

"휴. 얼마나 더 떠드려고 그래?"

"아니야 자러 가자. 나도 이제 목이 아파."


살짝 삐지긴 했지만 시간을 보니 2시간 정도 떠들었다. 이 정도면 목이 아플만하다.




일전에 아내가 나보고 "오빠는 불효자라서 좋아."라고 쓴 적이 있다.

이때 [불효자]에 대한 의미가 궁금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불효자에 대해 알려면 일단 [효자]에 대해 아는 게 순서일 테지.

여기서 효자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모습이 맞다. 즉, 유교적인 사상에 의해 정의되어 있는 자녀와 부모의 관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쯤 해서 아내는 도대체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불효자]스럽다라 칭했을까?


1. 기본적으로 연락을 하지 않는다. ('거의'라는 부사를 집어넣어 포장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과해 보여 빼버렸다.)

2. 만나게 되어도 근황에 대해 크게 물어보지 않는다.

3. 내가 못하는 효에 대해 아내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여기서 더 쓰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TMI를 남발하는 결과일 거 같아 이 정도로 정리하겠다.

살짝 핑계를 대자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할머니에게 길러져서라고 해두고 싶다.

그만큼 어린 시절 누구와 함께 생활하고 길러졌는지가 친목의 주요 요소인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거 같다.

추가로 개인주의 성향도 한 스푼 추가.


그렇다 해서 나의 이런 강퍅한 모습을 아내에게 요구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와 달리 좋은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살아온 아내의 삶에서 오히려 배우는 부분이 더 많다.


'만약 내가 아내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IF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지만, 아내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확실히 40대의 삶은 좀 더 무채색에 가까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게 존재하는 단점을 수용해 준 아내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오빠. 아니 야! 너 뭐 샀지?"

"어?"

"갑자기 어디서 입에 발린 소리야!"

"허허. 사람 참."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거 보니 뭔가 있는데? 사실대로 말해."


의식 못하는 새, 나도 모르게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나 보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음. 흐음. 오호. 그렇게 된 것이군."

"뭐?"


살짝 고백하자면 '뭔가'를 지르긴 했다. 다만 그걸 공개하기가 좀 꺼려진달까. 머리를 굴려야 한다.


'아! 됐다.'


"빨리 안 말해?"

"그게. 부모님 드시라고 그릭 요거트라도 한 통 사서 보내볼까 하는데."

"됐거든! 그런 거 안 좋아하셔."


됐다. 돈도 굳고 위기도 회피할 수 있겠어. 어차피 굳는 돈도 아내의 수중에서 나올 예정인 돈이긴 했지만 상관없겠지.


"갑자기 그런 생각은 왜 했대? 평소에나 잘하지. 전화도 좀 드리고."

"하하. 그러게 말이야. 내가 참 넉살이 안 좋긴 해."

"그런 건 넉살이 아니라... 됐다."


아내의 서운해하는 표정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전화 한 통화가 뭐 대수라고. 이렇게나 걸기가 힘든 건지.'


조만간 꼭, 반드시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

이번엔 부디 핑계 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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