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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도적이자 연쇄살인범.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에게 어떤 손님이라도 크기가 맞는 침대가 있다며 손님에게 누워보게 유도한 다음, 침대보다 키가 크면 남는 목을 잘라버리고,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춰 강제로 늘려서 뼈와 근육을 아작 내는 식으로 상대를 살해했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할 당신을 위해서 링크를 달아둔다.
https://namu.wiki/w/%ED%94%84%EB%A1%9C%ED%81%AC%EB%A3%A8%EC%8A%A4%ED%85%8C%EC%8A%A4
"오빠 입맛 맞추는 거 얼마나 까다로운지 모르지?"
"나 정도면 무난하지 않아?"
"웃기시네. 이게 옆에서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일이니 다른 사람한텐 설명할 수도 없고 휴. 여튼 나니까 살아주는 줄 알라고."
오늘도 영문 모를 힐난과 함께 산뜻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제 11년 차 부부. (맞나?)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할 정도의 세월이라던데 그녀와 나도 많은 게 바뀌었겠지?
아내의 증언대로라면 까탈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 취향이 꽤나 까탈스러워졌다는 건데.
"원래부터 까탈스러웠다고 인간아.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게 아니라고."
한 가지는 확실한 거 같다. 십 년이란 세월 동안 아내의 말투는 상당히 전투적이 되었다. 물론 그중 내 지분이 9할은 될 거 같기도 하지만 '인정하긴 싫어.' 정도로 해두련다.
친구라도 있으면 어디 하소연이라도 해볼 텐데. 안타깝게도 평생 혼자 놀기에 익숙한 탓에 터놓고 얘기할 사람도 없다.
딱 이런 상황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유느님과 나의 재력차이...?
-그것뿐일 리가 없잖아요? 인성, 명예, 사회적 지위 등 하나부터 열까지 닮은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는구만.
"......"
그래서 결국 나는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유일한 나의 대나무숲.
하지만 쓰면 쓸수록 바닥을 드러내는 일처럼 보이는 거 같아 '이게 맞나?' 싶을 때도 많다.
지금부터 이 글을 읽어줄 그대가 나의 유일한 벗이 되리라.
-그럴 생각 없는데요.
괜찮다. 나는 그럴 생각 있으니까.
게다가 이 공간은 아무리 뭐라 해도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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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시시콜콜한 이야깃거리가 생길 때마다 전화해서 몇 시간이고 떠들곤 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친구]가 있었다. 덕분에 많게 나올 때는 통신비가 몇 십만 원이 나온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 돈을 절약해 맛있는 거라도 사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엔 감정을 쏟아내고 들어주고 하는 시간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그들 중 내게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다.
'잘못 살은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모습이 과거가 쌓여서 이뤄진 내 모습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게 아닐까.
대신 가족은 얻었다. 내 인생에 가족마저 없었더라면 정말로 외로운 사람이 되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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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거 아닌 일상을 함께 나누고 깔깔거릴 수 있는 이가 있는 삶은 무척이나 풍요롭겠지.
하지만 이미 아는 맛이다.
예전처럼 그 맛을 찍먹해 보지 못해서 아쉬울 때가 없다 하면 거짓이지만, 그렇다 해서 나쁘기만 하지도 않다.
즉, '친구가 없어서 괴로운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
얽매이는 걸 포기하는 대신 자유로움이 생기긴 했다.
어떤 이는 이런 나의 합리화를 바라보며 "쯧!"하고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넘칠 정도로 과분한 선물이니까.
과거에 친구로 여기는 이가 많았다고 생각하던 시절보다도 오히려 지금이 마음은 훨씬 안정적이다.
그런 나와 십 년을 넘게 살다 보니 아내 또한 나처럼 되어 가고 있는 건 [유감]이다.
"나도 이게 편해."
의외로 아내는 구구절절한 이유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담백하다. 굳이 설명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미안한데.
"내가 당신보다는 친구가 훨씬 많으니까 본인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아... 까먹고 있었다. 아내는 친구가 없지 않구나? 단지 의미 없이 만나는 행위를 줄인 것뿐이다. 당장에라도 마음만 먹으면 만날 사람이 꽤 있는 편이니까. 사는 지역이 바뀌었지만 나보다는 확실히 친화력 갑이다.
"난 오빠가 누군가를 꼭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단지 입맛 까다롭게만 굴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꾸 까탈스럽게 행동하면 안 놀아준다?"
"뭣!?"
"거짓말 아니야. 내가 붙어서 몇 년 지내보니까 왜 그렇게 데면데면한 부부가 많은지 알겠더라고. 아주 지긋지긋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40대 밖에 안 됐는데 늙은이 같이 꼬장꼬장하기나 하고 말이야."
"어허... 그거 노인 비하란다."
"그냥 해본 소리야. 뭘 또 꼬투리 잡고선. 내가 오빠랑 안 놀아주면 어떻겠어. 그러니 나한테 잘해줘야겠어? 아니겠어?"
"잘, 잘해줘야겠지."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다.
"나보고 이래라저래라 좀 하지 말고, 실수하더라도 조금만 더 너그러이 봐주고, 작은 일 하나에도 꼬투리 잡으려고 좀 하지 말고! 응? 지나고 나서 보면 다 별 일 아니잖아. 어차피 될 일은 되는 거고, 안 될 일은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거라니까."
100% 동조할 수는 없지만, 최근에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무리 가깝고 곁에 있는 나라도 100% 입맛에 맞게 행동할 수는 없는 거야. 애초에 인간은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마음 좀 편히 먹고, 쫌생이처럼 굴지 마. 알아듣겠지?"
그러하구나. 그렇구나. 아무래도 내가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살았던 거구나.
"그럼 가장 님은 이만 돈 벌러 갔다 오마!"
"넵! 충성!"
가장 님의 기강 잡기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기강 잡힘은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이 또한 내게 관심이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정말로 꼴도 보기 싫을 정도였다면 말을 섞는 것조차 피하려 했겠지.
아내는 일을 하러 떠났다.
그리고 내게는 오늘 하루 주어진 미션이 몇 가지 있다.
1. 홍게 삶아 놓기 ⎯ 오랜만에 형님 가족이 놀러 오는 관계로 음식을 준비해 놓기로 했다.
2. 재활용&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 부끄럽지만 최근엔 아내가 거의 혼자 다 버렸다. 구질구질하게 변명은 늘어놓지 않겠다.
3. 집안 정리 ⎯ 일전에 형님이 개판인 집 상태를 보고선 "갈!"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 뒤로 트라우마가 살짝 생겼다.
4. 아이 케어 ⎯ 사실 둘이서 알아서 잘 놀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쓸 것도 없다. 그래도 아직은 챙겨줘야 할 게 있긴 하다.
그녀를 실망시키지 말자. 결국 지금의 모습이 쌓이고 쌓여 미래의 우리 관계에 영향을 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아끼는 관계로 더는 할 일을 뒤로 미루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그렇게나 까탈스럽단 말이지?'. 내가 또 작은 조언 하나도 흘려듣지 않으려 하는 버릇이 있다. 물론 흘려듣지 않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별개로 쳐두자.
이제는 한번 고집을 꺾고 아내의 조언에 귀 기울여 보는 게 어떨까 싶다.
'한 번쯤은, 그래 인생에 있어서 최소한 한 번쯤은 따라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더 이상 아내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올리지 말도록 하자. 그녀에게 필요한 침대는 그녀가 선택하도록 두자. 그것이 어쩌면 내조하는 남편의 참된 자세가 아닐까라며 집안일하러 떠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