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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208 걸음

by 고성프리맨
이야기란 어떤 사건에 의해 삶의 균형이 무너진 주인공이 그 균형을 회복하고자 여러 적대적인 것들과 맞서면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다.

로버트 맥기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삶이라는 것 자체가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인 거 같다.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과거 속의 특정인과 동질성을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내 삶이 누군가에게 내적친밀감을 불러올 수 있는 것. 적어도 인간에게 있어서 [이야기]란 살아갈 수 있는 힘이나 에너지와도 통하는 개념이 아닐까?


읽어본 적은 없지만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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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학습해야 할 게 참 많네.'


당연한 일이다. 글을 쓰겠다 마음먹은 순간부터 [학습]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너무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이 컸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최근 들어 [이야기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진작에 관심을 가졌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 부끄럽사옵니다."


'쓰다 보면 어떻게든 써지겠지...'라고 생각한 과거의 내 모습을 반성한다.


이야기를 쓴다는 건 아무렇게나 써도 될 거 같지만 막상 아무렇게나 쓰고 나면 재미와 감동(혹은 기타 감정)을 모두 놓치는 일이 빈번해진다. 아예 아무것도 안 써본 상태에선 뭐라도 쓰는 게 낫겠지만, 일단 꾸역꾸역 한번 써 보고 나니 살짝 위축됐달까. 차라리 하룻강아지처럼 두려움 없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목과 등장인물만 조금씩 바뀐다 뿐이지 쓰는 글이 다 똑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오빠. 내가 말했잖아. 똑같아 보이는 게 아니라 빼다 박았다니까? 신선함도 없고,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대화도 다 비슷해."


송곳 같은 아내의 피드백을 듣자 하마터면 의욕을 잃을 뻔했다. 내가 생각해도 틀린 말이 없었다.


'차라리 재능 핑계 대면서 지금이라도 접어버리는 게 나으려나?'


그러다가도 아쉬움(이라 쓰고 미련?)이 생겨서 다시 노트북을 켜고 있는 모습이라니.


어쨌든 상황설명은 이쯤 하면 된 거 같고.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단 말인가 하면,


"기왕 쓸 거면 잘 쓰는 게 좋잖아!"가 되겠다.


솔직히 이런 말을 지망생 정도밖에 안 되는 내가 한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가려운 곳을 혼자라도 긁어 보겠다는 호기 또는 포부 정도로 봐주면 좋겠다.




'느슨해져 있던 글쓰기에 긴장감을 더해보자.'


잘 써지지 않는다면, 잘 쓸 수 있는 법에 대해 공부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어떻게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내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는 [위기]라는 게 별로 없어 보인다. 처음에 언급한 문장처럼 딱히 [삶의 균형]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밋밋한 일상을 단조롭고 평화로운 상태로 살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가령, 나이가 어느 정도 차서 회사의 중역으로 성장한 주인공이 소개팅을 받으러 나갔다.
상대 여성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특별함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둘이 만나 할 수 있는 대화라곤 약간의 티키타카 정도뿐이며 그마저도 심심하다.
어찌 보면 일상에서 흔히 만나볼 법한 남녀 주인공이지만 그래서인지 굳이 읽어야 할 필요성까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 소재로 글을 쓰면 안 된다 이 말 아니겠어?'


맞는 말이다. 물건을 하나 팔더라도 좀 더 고객의 이목을 붙잡을 수 있는 형태로 진열을 하거나 가격을 어필하거나 하는 노력이 들어가는데, 내 글에는 기본적인 노력조차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그토록 많이 보고 있는 유튜브 채널들의 썸네일을 유심히 지켜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애초에 글을 읽어달라는 부탁을 하기 전에 읽고 싶게 만들 요소부터 만들어 냈어야 한다.


'그러니까 좀 더 이목을 끌 수 있는 파격적이고 막장인 요소를 많이 집어넣어라?'


역시 난 아직 배움이 많이 부족하다.




문득 내 글에서도 많이 읽어준 내용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대충 빠르게 정리해 보자면 [40대 퇴사한 남자는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는가?]라는 주제인 거 같다.


안타깝게도 내가 쓴 글에선 [밥벌이 방법]은 쓰여있지 않다. 여하튼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닌 [나]로 놓고 보자면,


- 40에 회사생활 접음.

- 매달 갚아야 할 대출금 갚아나갈 길이 막힘.

- 게다가 4인 가족.

- 아이들은 아직 초등학생.

- 남편은 이 와중에 글을 써보겠다며 놀기를 자청.

- 어쩔 수없이 아내가 아르바이트로 생계유지.


위기의 가족... 이대로 괜찮은가? 그들에게 해법이 있다면?


'아니 이게 왜 소설이 아니라 내 상황인거지?!'


일단 확실한 건 회사라는 버팀목이 사라지면서 [삶의 균형]이 살짝 무너진 상태는 맞고, 이 위기를 잘 헤쳐나가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내가 잘 해내기만 한다면 나름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지 않는가?


"......"


갑자기 쓰다 보니 우울하네.




한동안은 일부러라도 생각해 내는 주인공의 삶이 불행할 예정이다. 안타깝지만 상상 속의 인물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미리 전하도록 하겠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따윈 생각하지도 않겠어!'


지극히 평범한 지능을 가진 나로선 삶의 균형을 박살 내려면 극단적인 생각 밖에는 떠오르지가 않는다. 아쉽지만 이렇게라도 접근해 보는 수밖에.


당장 엄청나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낼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든 이야기는 계속 써볼 생각이다. 지금도 어찌 보면 일상 수필을 가장한 박살 난 40대 남주인공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필 그 주인공이 나는 아니었으면 했는데.


[쓰고, 읽고, 익히기]


올해는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세 가지만 집중해서 해보자.


"아니 오빠 미쳤어?! 그거 말고 먹고살 것도 신경 써야지!"


'흐음. 삶의 균형이 박살 난 주인공을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든다.


"지금 장난해?"


아차! 이건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었지.

불편해진 아내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러 빨리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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