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걸음
"흰머리가 많이 생겼는데? 염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무심코 아내가 내 옆머리를 쓸어 넘기다 꺼낸 얘기에 답을 했다.
"그냥 안 하려고."
"백발로 살게?"
거울로 봤을 땐 아직 잘 티가 나진 않는데 가까이서 보면 제법 흰머리가 보이나 보네.
"염색은 생각 안 해봤어."
그러고 보니 머리에 신경 안 쓰고 산지도 꽤 오래된 거 같다.
예전엔 주기적으로 커트도 하고, 펌을 할 때도 있었으며, 스타일링 제품으로 머리를 꾸며보기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게 돼버렸다.
혹시 결혼을 해서 관리를 하지 않게 된 거냐고 물어보신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뭔가 20대 때처럼 열정적으로 꾸미지 않는다 뿐이지 그래도 할 수 있는 선에서의 깔끔함은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다. 물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살짝 자연인을 닮아 있지만.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이템도 하나 생겼다.
모자. 굳이 종류를 정해보자면 [볼캡모자]다. 머리를 감은 날에도 혹은 감지 않은 날에도 많이 애정하는 중이다. 가끔은 모자 없이 돌아다니는 게 벌거벗은 느낌이 들 때도 있을 정도다.
생각해 보면 옷을 사지 않은지도 꽤 된 거 같다.
일 년으로 놓고 봤을 때 의류비 명목으로 쓰는 돈은 그리 크지 않은 거 같다.
회사를 다닐 땐 어쩔 수 없이라도 가끔은 사게 됐었는데 집에 틀어박히면서부턴 그동안 샀던 옷으로도 충분하달까.
게다가 차를 이용하다 보니 계절의 구분감도 크게 들지 않아서 더더욱 돈을 안 쓰게 돼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군 뭐 쇼핑하나? 나 맨날 싸구려 옷 타오바오에서 사서 입는 거 몰라?!"
나는 그렇다 치고 아내는 사실 나보다도 더 짭짜름하게 생활 중이다. 가끔은 좋은 옷을 사서 입어도 좋으련만, 부득불 우겨가며 굳이 타오바오에서 떨이로 파는 제품을 구매해 입고 있다. 물론 그 옷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왠지 짠해진다.
그렇다고 아이들 의류비로 돈을 많이 쓰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성장기의 아이답게 하루가 달리 쑥쑥 커가다 보니 자칫하면 의류비가 꽤 들 텐데, 감사하게도 옷을 전달해 주시는 분이 계신다. 조금 더 성장해서 [자신만의 취향]이 생기기 전까진, 혹은 물려 입기 싫다고 하기 전까진 아마도 한동안은 아이에게 쓰는 의류비 또한 크게 나가지는 않을 거로 예상된다.
어찌 보면 짠하게 보이려나. 하지만 뭐 크게 나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벗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뭐.
그래도 혹시 모르니 벗을 때를 대비해 몸을 조금 이쁘게 만들어 놓고 싶다는 욕심은 있다.
"어디서 벗고 다니려고 이 영감탱이가 진짜."
"목욕탕?"
"가지도 않잖아. 애들이랑 추억도 쌓을 겸 그렇게 가라고 해도 가지를 않으니."
'그러고 보니 대중목욕탕도 진짜 잘 안 가는 편이구나. 새해도 되었는데 한번 애들 데리고 가볼까.'
참고로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 고성]에서 애정하는 사우나가 하나 있긴 하다.
사진이라도 한 장 올리고 싶어 인터넷을 뒤졌으나 프라이빗한 공간인지라 구하지는 못했다.
그곳은 바로 [소노캄 델피노 사우나]인데, 겨울을 제외한 날씨엔 노천 온천탕(이 맞는지는 모르겠다)까지 이용이 가능하다. 이곳은 설악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목욕을 즐길 수 있는 데다 시설도 좋은 편이다. 가격은 살짝 나가는 편이지만 넓고 깨끗하고 탕도 많아서 아이 데리고 가기엔 더없이 좋다고 생각한다.
'말 나온 김에 한번 가봐야겠어.'
최근엔 날씨가 많이 따듯해졌다. 어제는 영상 7도였었고, 오늘은 영상 5도로 표시된다. 미세먼지만 아니라면 나들이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 서울보다는 확실히 공기가 좋지만 가끔씩은 지금처럼 미세먼지의 영향을 살짝 받을 때가 있긴 하다. 그래도 대부분 공기가 맑은 편이라 이 부분만큼은 살고 있는 이곳이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가끔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강원도 너무 춥지 않아요?"
"눈도 엄청 오죠?"
살아보기 전에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따뜻하고, 생각보다 눈도 엄청 내리진 않는다. 강원도도 넓은 편이다 보니 내륙은 모르겠는데, 해안가 쪽은 서울보다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물론 눈이 한번 내릴 때 엄청나게 내리는 경향은 없지 않아 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올해 눈 쌓인 걸 보지는 못했네.
가끔 이상한 상상을 해본다.
모든 인프라가 집중돼 있고 살기 좋은 서울의 공기가 점점 나빠지다 보면 어쩔 수없이 '동으로 동으로' 이동하게 되어버리진 않을까라고. 아마 그럴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상상은 자유니.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현실적인 제약이 상당히 많긴 하다. 일단 이곳은 생계유지에 필요한 많은 것이 부족한 상태기 때문이다. 관광 자원과 수・농・축산업 만으로는 많은 수의 사람을 정착시킬 수 없다.
내 경우엔 우연찮게 고성에 살게 되었지만 보시다시피 현직 백수다. 대신 시간 부자답게 여러 가지 관찰할 시간만큼은 충분한 편이다.
몇 년 지내다 보니 제법 인구 구성이 눈에 들어왔는데, 원래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이 반 정도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외지인]인 듯싶다.
나 또한 외지인이라면 외지인에 꾸역꾸역 집어넣을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외지인은 삶의 여유가 상당히 있어 보이는 층을 의미한다.
즉 서울에 집 한 채, 고성에 집 한 채를 가지고 오고 가며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비유한 내용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서울과 고성에 집을 두채 가지고 있다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결국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여유 또한 대부분은 어느 정도 [부]를 이룬 사람이 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자랑이냐고?
만약 내가 위에 써놓은 층에 속한 외지인이었다면 충분히 자랑이 됐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공기는 좋으니까 한잔해."
백발에서 시작해 끄적이던 글이 알 수 없는 흐름에 의해 맑은 공기 얘기로 끝나버렸다.
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내 글을 읽어주신 분이라면 이 정도 의식의 흐름은 그러려니 해주실지도 모르겠다.
잘 자고 일어났지만 오늘도 내 정신은 어딘가를 둥둥 떠다니며 부유 중이다. 하지만 난 흩어져 버린 정신을 굳이 모아 모아 집중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흩어진 정신세계는 그러한 대로 가만히 두고 볼 뿐이다. 그 와중에도 하나하나를 의식해 좇아가다 보면 뭔가를 끄적이게 된다.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글을 끄적이는 일상.
"팔자 좋네. 뭐 어쩌겠어. 쌔가빠지게 내가 일해야지 뭐."
아내의 정다운 지저귐 또한 듣기에 나쁘지 않다.
오늘도 평소의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 시작되었고 진행 중이다.
그 안에서 나는 특별한 무언가를 하려고도 혹은 하지 않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단지 그러한 일상을 기록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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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는 한번 큰 주제를 가지고 [연재]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매번 의식의 흐름처럼 글을 쓰는 것도 단조로우니, 이참에 한번 새로운 시도도 해보도록 하자.
여하튼 글을 쓰는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음에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