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걸음
'과정은 기억나는데 [결말]이 떠오르지 않네?'
분명 봤던 작품인데도 도통 어떤 식으로 끝났었는지 떠오르지가 않는다. 중간에 일어났던 사건이나 과정은 떠오르는 반면, 어째서 마지막 결론만 기억이 나질 않는가.
한번 생긴 궁금증 덕에 결국 작품을 다시 찾았다.
한 번쯤은 [피구왕 통키]를 다룰 예정이었다.
오복성 패스, 태백산, 타이거, 회전 회오리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인물과 기술명에 벌써 가슴이 설렌다.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태백산]이라 불리는 인물의 등장씬이었다.
초등학생으로 설정되어 있는 게 무색할 정도의 완력을 자랑하는 녀석. 한 손으로 철봉에 올라탄 것으로 모자라 나머지 손으로는 땅콩을 까먹는 여유마저 부린다. 그리고 이런 완력을 활용해 [파워슛]이라는 피구공이 터질 정도의 필살슛까지 완성시켰다.
하지만 통키에겐 진다. 왜? 통키가 주인공이니까.
이외에도 주옥같은 장면이 참 많은데, 오늘 통키의 그런 흥미로운 요소 소개가 주제는 아닌 관계로 여기까지만 써보겠다.
내가 궁금했던 건 바로 [피구왕 통키의 결말]이었다.
'어떻게 끝났었더라???'
분명 마지막화까지 다 봤던 거 같은데(물론 만화책이 아닌 애니로만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 마지막 장면 때문에 한참을 괴로워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화를 찾아서 보자 마음이 후련해지더라.
'아... 이랬었지.'
그러다 놀라운 소식을 하나 알게 됐다. 애니와 달리 만화책에서는 통키 아빠의 근황을 다루고 있다는 소식.
"응? 통키 아빠 돌아가신 거 아니었나?"
툭하면 아빠 회상씬이 등장하고, 통키 엄마가 혼자서 아들을 키워나가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닌데요? 통키 아부지 멀쩡히 살아 계십니다요. 심지어 아들과 재회도 하는데요?
?
설마 하는 마음으로 찾아봤다.
.
.
.
소문은 사실이었다. 아니지. 소문이 아니라 실제로 재회씬이 있는 게 아닌가?
대체 통키 아버지는, 돈벌이도 안 되는 공놀이를 하느라 가족도 내팽개치고 뭐 하고 다니다가 뒤늦게 나타났다는 말인가. 통키 엄마는 보살인가? 아빠의 공놀이 자아실현을 위해 마음대로 살다 오라고 보내주는 여성이라니.
[이것 참 귀하네요.]
그러고 보면 통키 엄마의 삶도 기구하다. 재벌집 자제가 그토록 구애했었는데 사랑을 좇아 통키 아버지를 선택했었고, 결혼 후에는 독박 육아와 가장의 삶을 병행해야 했다. (구애하던 대상은 타이거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이 스토리 왠지 낯설지가 않네?
"내 얘기잖아 이거?"
"어?"
"내 삶이랑 다를 게 없잖아. 돈도 내가 벌어, 독박으로 집안일도 다해. 그냥 같은 공간에서 숨 쉬고 살아간다 뿐이지, 오빠가 통키 아빠랑 다를 게 뭐야?"
"......"
나는 그만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웃자고 시작한 이야기가 내게 부메랑처럼 돌아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 데미지는 '꽤나 아파'랄까.
그래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피구왕 통키]에 대해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아주 성과가 없던 것 아니다.
"정신 못 차리고 쯧쯧. 가장 님 배고픈데 밥이나 좀 차려봐라."
"네, 넵!"
이래서 통키 아버지는 유럽으로 훌훌 떠나버렸던 걸까. 결국 돈이 떨어져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긴 하겠지만 말이다.
'마음만은 편했을 거 아니냐고.'
새삼 이 양반의 삶이 나쁘지만은 않았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부러우면 당신도 어디 산속으로라도 떠나보던가?
그냥 나쁘지 않겠다 싶은 거지, 결코 난 이 집에서 한 발짝도 떠날 생각이 없다.
집 나가봤자 개고생이다.
40대가 들어선 나는 세상의 이치를 확실히 알고 있다.
내게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처럼은 결코 살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
문득 [아내에 대한 감사함]이 새삼스럽게 재생성됐다.
"오늘 점심은 내가 아주 미슐랭 후릴 정도로 만들어볼게요 ^-^*"
"반드시 그러도록해. 안 그러면 내가 후려버릴지도 모르니까."
사람은 참 좋은데, 입이 좀 걸걸하단 말이야. 그게 매력이지만 후훗.
오늘도 힘내서 밥을 차려야겠다.
'그나저나 오늘 점심은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