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걸음
한 우물을 파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아마도 청소년 시절 방망이 깎던 노인이 내게 끼친 영향 중 하나였으리라.
나도 모르는 새 장인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았나 보다.
'노인의 삶은 행복했을까?'
수필 속 장인으로 묘사되던 노인의 말년이 어땠을지는 기재된 바 없으니 알 수 없다. 다만 이름도 정확히 모를 글 속 노인의 모습이 내게 끼친 영향 때문에라도 행복하셨기를 바랄 뿐이다.
첫 시작은 컴퓨터 수리였다.
'나도 이제 S/W 개발일을 할 수 있나 보다!'라는 생각이 무색해지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회사에서는 개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신입에게 위험을 무릅쓸 수 없는 일.
"아마 입사하게 되면 컴퓨터도 좀 고치고... 시간 나면 개발도 좀 해보고 그렇게 될 거야."
면접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더랬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업무 중 최우선순위는 컴퓨터 수리였다.
날마다 고장 난 PC가 내 앞에 쌓여 있었고, 하루종일 수리하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남는 시간을 활용해 개발이라는 걸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혼자서 깨작거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퇴보하고 있었다. 정체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독학하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옆에서 업무시간에 컴퓨터와 책을 펼쳐놓고 개발에 몰두하는 다른 직원이 부러웠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주어졌으면 했다.
하지만 결국 그 회사를 다니는 동안 기회는 얻지 못했다.
방망이를 열심히 깎으며 살고 싶었을 뿐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전체적인 방향을 다시 잡아야 했다. 이러다가는 방망이는커녕 이쑤시개조차 못 만들어볼 거다.
다시 이력서를 작성하고 지원을 했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내게 일자리를 줄 만큼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면접에 불려 간 적도 있었다.
"당신이 우리 회사에 뽑히면 뭘 할 수 있죠? 이력서 상으로 보면 용산에 취업하는 게 더 맞을 거 같습니다만?"
"저, 시켜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자 판에 박힌 듯한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대사가 날아왔다.
"열심히 하겠다는 사람은 많아요. 우리는 그런 사람 말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잘 가요."
분하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패기와 열정만으로 뚫을 수 있는 취업 시장이 아니라는 걸 나도 이젠 몸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내게 부족한 것은 방망이를 깎을 수 있는 기술 그리고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멀리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제대로 학습을 했어야 하는데, 일단 일부터 배우고 뒤늦게 이론을 익히려던 내 얕은 술수에 스스로 당해버린 셈이었다.
'뽑아만 주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분골쇄신할 자신이 있는데.'
그런 마음을 아무리 어필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어필할 수 있는 자리도 많지 않았고.
'학원이라도 다녀보자.'
내 계획은 전면 수정됐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학원을 다녔다.
운이 좋았다.
학원에서 연계해 주는 취업알선 덕에 그토록 해보고 싶던 개발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게 됐다.
'더 이상 수리기사 노릇하지 않아도 돼.'
컴퓨터 수리랑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걸 일찍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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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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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부터 여기가 자리예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기대가 커요 허허."
"네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게 주어진 컴퓨터와 모니터 두대. 그리고 다소 살풍경해 보이는 사무실의 모습. 분주한 사람들 속 나만 멀뚱히 앉아 있었다. 일단은 눈이 주변에 적응해야 했다.
"오늘부터 출근이시라고?"
"아 네네."
"아휴. 자꾸 신입만 뽑아주면 어쩌라는 건지. 자 길게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빨리 알아듣고 오늘은 문서 쭉 읽어봐요. 제출해야 할 서류들 작성도 하고."
"네에..."
사수의 눈빛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뒤늦게 알았지만 한창 바쁜 시기여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상태였다고 한다. 안 그래도 많은 분량의 일을 혼자 다해내던 참이라 가뜩이나 신경도 예민해져 있었나 보다.
"야! 내가 공백이랑 들여 쓰기 잘하라고 했지! 자꾸 이렇게 가독성 없게 짜놓지 좀 마라고."
"죄송합니다..."
깐깐하고 엄하고 무서운 사수. 그 앞에서 숙제 검사를 받을 때마다 나는 주눅이 들었다. 주로 혼나는 게 일이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기뻤다. 어찌 됐건 방망이를 깎고는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는 내 앞에서 수없이 많은 한숨을 내뱉었다. 때로는 탄성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날엔 험한 소리로 변질되기도 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가 있다.
당시엔 무섭고 엄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누구보다 내게 애정을 쏟은 사람이었다는 것.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탐탁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실력 없이 고집만 내세우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
'표현만 조금 따뜻하게 해 주면 좋을 텐데.'
내 기대와 욕심 때문에 그의 성정이 바뀌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리 와서 한잔 받아!"
"네..."
오늘도 혼내려나? 일전에 있었던 작업물을 떠올려봤다. 분명 그의 스타일에 맞춰서 나쁘지 않게 작성한 거 같은데.
"혹시 제가 실수한 게 있을까요?"
"뭐? 야! 넌 뭐 나를... 됐다 됐어. 그래도 많이 좋아졌더라."
"네?"
"갈길이 멀지만 이 정도면 다른 회사도 취업 가능하겠다고."
그에게 처음으로 듣는 인정의 말이었다. 물론 부족함 투성이라는 게 변하진 않았다.
.
.
.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와의 불화 때문은 아니었지만 이후 나는 그의 품을 떠나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한번 쌓아놓은 경력과 어린 나이라는 이점으로 인해(연봉도 작았던 게 한몫했다) 이직하는 건 생각보다 수월했다.
엄격한 사수와의 첫 만남 때처럼 다짜고짜 한숨부터 토해내는 일을 겪지도 않았다.
'이제부터는 방망이 깎는 젊은이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기만 하면 되겠어.'
구구절절하게 후일담에 대해 기재하는 대신 상당히 높은 압축률로 중간 과정을 생략하도록 하겠다.
전래동화에서 나올 법한 마법의 문구처럼,
"그 뒤로 A와 B는 잘 먹고 잘 살았답니다."로 끝맺음하고 싶지만 어딜 감히 그럴 수는 없지.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방깎노(길어서 줄였다)의 장인정신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 오랜 시간 외길을 걸어봤다. 그리고 지금은 보다시피 백수로 전직했다.
더 이상 내 인생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던 사수를 만날 일도 생기지 않는다. 내 멱살을 붙잡고 "나만 따라와. 밥 먹고 살게 해 줄 테니!"라고 해주는 사람이 없다 이 말이다.
-한 우물을 파봤던 경험이 좋았나요?
"행복했었습니다. 다만 아쉬움 또한 남습니다."
물론 한 우물이라 함은 지극히 주관적인 내 견해일 뿐이니 오해 없으시길. 혹시라도 나와 같이 일해봤던 동료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네가?"라고 할지도 모르니 주관이라는 단어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내 생각에 방깎노의 여생은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을 거 같다.
그냥 주어진 일이 있으니 할 뿐 아니었을까?
노인과 나의 차이점은 스스로에게 주어진 밥그릇을 차버렸다는 거?
오늘따라 왠지 문득 수필을 썼던 작가의 감정에 이입하게 되는구나.
어쩌면 그도 방망이를 계속 깎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