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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도 없이 바쁘다 바빠.

217 걸음

by 고성프리맨

"아빠! 오늘 목욕탕 가는 거죠?"

"그러기로 했지... 어? 잠깐,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더라?"


목욕탕에 가면 보통 두 시간 정도는 있어야 되니까.

글을 빨리 쓴다고 가정하면 몇 시가 되려나.


10시? 10시 30분? 11시?


글을 쓴다는 게 딱히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확신은 서지 않는다. 일단 11시 안으로 쓴다고 가정하면 차 타고 이동하는 데 20분 정도 걸릴 테니 대충 10분을 추가해서 11시 30분쯤 도착한다 치자. 여기에 두 시간을 더하면 13시 30분. 그러면 다시 집까지 오는데 20분이 걸리고 거진 오후 2시가 되겠구나.


오후 2시엔 작은 아이가 학원을 가야 한다. 이대로면 점심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텐데?

그리고 오후 3시가 되면 큰 아이와 아내가 각각 등원 및 출근을 해야 해서 데려다줘야 할 테고...


"이거 백수 주제에 왜 이렇게 빠듯한 거야?!"

"오빠. 누가 들으면 욕해. 이게 빠듯해? 다들 이거보단 더 바쁘게 살거든?"

"아⎯ 아빠가 글 안 쓰면 되는데, 맨날 글 쓴다고 해서 일정도 꼬이고 가고 싶다고 해도 못 가고."

"......"


이대로면 우리 집 대역죄인이 될 기세다. 이게 다 내가 되도록이면 오전 중에 글을 쓰려하는 습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일, 일단 글부터 어떻게든 써볼게."


가족의 푸념을 뒤로하고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걸어 잠갔다. 오늘의 작업실은 아내의 화장대 겸 노트북 거치대로 활용되는 공간되시겠다.


결혼 이후로 내 공간이 주어진 적은 딱히 없으므로 이렇게 집안에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남는 자투리 공간에서 대충 글을 쓰는 편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려 했으나 딱히 답이 나올 고민이 아닌듯하니 뒤로 미루자.




쫓기는 마음이다. 뒤에서 누군가 추격해 오는 심정이 느껴진다. 당최 누구도 나를 닦달하지 않았음에도 혼자만 추노꾼에게 쫓기는 노비처럼 마음이 조급해지기만 한다.


'빨리 써야 해. 빨리. 조금만 더!'


현재 글 쓰는 내 심정이 느껴지는가? 별 내용도 없이 그저 빨리 써야 한다는 경각심만이 나를 휘감고 있다. 위기감마저 든다.


'이대로라면 맨날 거짓말만 하고 지키지 못할 공략만 내뱉는 양치기 아빠가 될 거야.'


애초에 아이들도 포기한듯하다.


"됐어요. 내일 가요. 내일. (뭐. 어차피 내일도 또 핑계가 생기겠지?)"

"그래 내일 가자 얘들아. 뭐 내일도 아빠는 또 다른 핑곗거리 만들어 올 거야 분명. 맞지 여보?"

"아빠는 맨날... 좀 늦게 하면 안 돼요?"

"......"


가족의 행동 또한 다소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안방에 홀로 있지만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시킨다.


'이래서야 집중을 할 수가 있나.'




처음 내 글을 읽는다면 다소 의아할 것이다.


-아니 뭐 전문작가라도 되는 거야? 연재 중이기라도 하면 이해가 되겠는데... 목욕탕 갔다 오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핑계를 댈 수밖에.


"리듬, 파워 그리고 집중력! 그중 제일은 리듬!"


-???


RPG.jpeg 김성모 화백의 R.P.G


매일 저녁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리듬(루틴)을 깨지 않고 부디 내일도 무사히 글을 쓸 수 있게 해 주세요.'


들을 리 없는 글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사실 나도 이해가 잘 되진 않는다.

이것은 아집인가 고집인가. (둘 다 별로인 거 아닌가?)


아이의 말처럼 굳이 글을 쓰지 않는다 하여도 일상에 큰 문제가 생길 리도 만무한데.

단지 나만 포기할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토록 단순하고 명확한 해결책이 존재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쓰고 있다.


"고민할 시간에 빨리 쓰라고! 목욕탕 갈 거야 말 거야?"


마치 28일 후에나 나올법한 앙칼진 목소리(또는 외침 혹은 비명소리)와 눈빛(문을 걸어 잠갔지만 매섭게 쳐다보는 눈빛이 보이는 기분)은 나를 더더욱 옥죈다.


"조, 조금만 시간을 줄 수 있어?"

"언제까지?"

"말 좀 그만 걸면 안 돼? 그 시간에 다 썼겠어."


평행우주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내가 있다면 진실로 이 시간에 이미 글을 다 완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곳에서는 천대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자유로이 쓰고 있거나 혹은 그럴 여유조차 없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평행우주 속 나 또한 글을 쓰고 있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정도는 아니 바람 정도는 가지고 있다. 실로 소박하지 아니한가. 뭔가 그곳에서도 자기만족에 취해 쓰는 존재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해 할 수 있다니.




[미션에 성공하셨습니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야?"

"이젠 환청까지 듣니?"

"분명히 들었는데... 이것은?"


최소한의 기준인 2,000자를 통과했을 때만 내 귀에 들린다던 효과음?


'하하. 성공했어. 됐어. 도대체 무슨 글을 썼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쓴 거야. 그걸로 됐어.'


미안하지만 오늘 글의 주제는 모르겠다. 목욕탕을 빨리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최대한 빨리 써야만 했고, 그래서 이런 글이 만들어졌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 없다고 했건만, 오늘의 글은 내게 어떤 자식이 되려나?


"안 갈 거냐고! 갈!"

"다 됐어요 호호. 조금만 마무리를."


하아.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정말로 떠나야만 한다.


'사실 난 대중목욕탕 가는 것도 별론데.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돌아다니기 싫단 말이야.'


그래도 가족이 가고 싶어 하는데 안 갈 수는 없다. 그것이 아빠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책무이니까.

마무리로 끄덕좌를 부르며 끝낼까 싶었는데 몇 번 써먹은 관계로 이대로 마침표를 크게 찍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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