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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찍먹인가 부먹인가?

218 걸음

by 고성프리맨

무언가를 결정할 때 이유가 있는 편인가?

본인만의 기준과 원칙이 존재하는가?

혹시 그것이 그대의 신념인가?

각자의 신념에 따른 선택, 후회, 번복이 쌓여 결국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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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상사 중 한 명은 내게 강요하는 게 많았다. 나의 가치관이 못마땅하다 여기면 바꾸려 했고, 행동 하나하나 마다 이유를 붙이며 파훼하려 했다.


"초기 멤버끼리는 모든 걸 공유할 수 있어야 해. 우리끼리조차 신뢰가 없다면 뒤이어 합류할 사람들은 어떻게 통솔할 거야?"




그간 스타트업이라는 형태의 기업을 몇 군데 다니긴 했었지만, 극초반부터 함께 시작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은 어느 정도 초기 이후의 단계를 향해 가며 인원수도 적당히 늘어나 있는 기업에 입사했다. 그런고로 창업 멤버가 되어 극대화된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내게 갑작스럽게 기회가 찾아왔다. 어쩌면 사람이 필요했을 그에게도, 기회를 잡고 싶었던 내게도 딱 맞는 상황이었으려나. 지나고 나서는 좋은 경험이었거니 하며 추억거리 하나로 남았지만, 당시엔 오랜 기다림 끝에 잡은 동아줄이란 생각이 강했다. 그만큼 잘하고 싶었고 나를 불러준 그에게 인정이란 걸 받고 싶었다.


"칼퇴가 웬 말이야. 그런 거 하면서 승진? 돈 많이 버는 거? 이딴 거 생각도 하지 마라고 그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창업 멤버인 우리는 최소한 저녁 10시까지는 일하는 거야. 주말에도 당연히 필요한 건 해야 하고. 알아서들 잘하라고."

"나중에 다 돌려받을 테니 지금은 갈아 넣으라고."


당시 업무량이 상당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참고 또 참았다. 이직할 회사가 없던 건 아니지만 회사의 설립부터 함께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고 생각해서 더 열심히 해보려 했다.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다그치고 채찍질해야만 했다.


'이 기회는 누가 칼 들고 협박해서 잡으려는 게 아니다. 그토록 원하던 기회를 잡았는데 이렇게 떠내려 보낼 텐가? 언제까지 일반 직장인처럼 살 거야?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는 게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게 아니라고.'


살면서 이토록 간절히 성공을 염원한 적이 있던가?

그만큼 절실했고, 나를 비롯해 모인 다른 동료 또한 마찬가지였다.


'열심히 하다 보면 반드시 될 거야.'


수많은 스타트업이 생겼다 문 닫기를 반복했건만 어째서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열정 혹은 욕망에 이끌렸다고 밖엔 설명을 못하겠다.


여하튼 나를 불러준 그에게 충성을 다하고 싶었다. 일을 열심히 한다에서 조금은 변질된 욕심마저 생겼다.


'최고책임자인 그의 신뢰를 얻고 싶어.'


그런데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던 듯싶다. 나를 비롯한 동료는 일을 위한 일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무런 수익 모델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가 벌이는 일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우리는 일을 위한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로지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였다.


변질된 우리의 욕망은 급기야 서로를 감시하고 이간질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결국 전체주의로 가는 길이렸다?




고객은 없었다.

오로지 일을 하는 우리가 존재했으며, 일의 방향과 목적은 분명치 않았다.

무엇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뒤집어엎을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믿어야 해. 내가 다 계획한 게 있어. 이 아이템은 무조건 성공할 거니까 나만 믿으라고."


그래서 믿었다. 믿고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그의 말대로 꽃길만 펼쳐지리라.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비록 일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지만 '결코 잘못될 리가 없어.'라고만 생각했다.


종교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알 수 없는 불길이 내 안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반드시 성공할 거야. 성공시키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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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신념에서 비롯된 나의 욕심은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물론 월급쟁이로서 월급이 밀렸던 것도 아니고, 다음 직장으로 이직을 못했던 것도 아니니 완전한 비극이라 칭할 수는 없겠다.


"아니 일하지 않는 지금이 더 비극 아니냐고!"


어쩌면 아내에겐 가만히 있으며 움직이지 않는 지금의 내 모습이 더 비극처럼 느껴질 터.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내겐 광기가 존재했던 게 분명하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설명은 못했지만 "어쨌거나 난 성공한다니까?"라는 그릇된 신념에 지배되어 있었다.


'그때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내가 동일인이라는 생각은 못하겠다.

좋게 포장해 보자면 '내게도 한때 신념이 있던 적이 있었다.' 정도로 정리가 되려나.


지나고 나서 보면 별 거 아니게 느껴지는 것. 반대로 경험해 봤으니 별 거 아니라 생각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절대적으로 느껴지는 일 또한 흐르는 시간 앞에선 변할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그런 성향의 사람인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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