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걸음
"지원이 형아. 오늘 만날까?"
둘째는 오늘도 학교 선배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다.
"아빠. 나 형아 만나서 놀기로 했으니까 데려다 줄 거죠?"
"응."
이제는 이 패턴에도 제법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걱정이 많이 됐었다.
특히 서울을 떠나 강원도로 이사 온 이후,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 하루의 절반 이상을 붙어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둥지를 벗어나 자유로이 놀려고 하는 아이의 모습이 낯설었달까.
"오빠는 너무 감싸고도는 거 같아. 난 초등학교 2학년 때 혼자서 라면도 끓여 먹고 오빠 밥도 차려주고 다했다고! 게다가 밖에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올 때도 많았고."
"시절이 많이 바뀌지 않았나."
"여기로 이사 온 이유가 뭔데? 자연 속에서 좀 자유로이 뛰어 놀라는 거 아니었어?"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면 2학년 때 나는 무얼 하며 지냈더라?
학교-집 / 집-학교
......
집돌이였구나.
"난 저 나이 때 집에서만 놀았어."
"그러니까 오빠가 그 모양이지. 자전거도 못 타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애들도 그렇게 키울 셈이야?"
두 발 자전거 못 타는 게 무슨 죄도 아니거늘. 그런데 진짜 나 뭐 하고 살았던 거지?
"잘 놀다 올게요!"
멀어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었다. 갑자기 콧날이 시큰거렸다. 아버지의 손길에서 벗어나 성장해 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어서 였으려나.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먹먹해진 마음을 추스르고 차에 올라탔다.
"잘 데려다주고 왔어?"
"응. 그런데 마음이 좀 그러네."
"뭐가. 뭘 그렇게 걱정이 많아."
"많이 컸더라. 이제는 알아서 밖에서 놀기도 하고. 차라리 기어 다니면서 쳐놓았던 울타리 올라타던 그 시절이 그립네."
"난 아닌데? 그땐 내가 독. 박. 육. 아 하던 시절이라고!"
"......"
반박은 하지 못했다. 그땐 왜 그렇게 회사 핑계 대며 쉬려고만 했던 걸까. 게다가 아내도 맞벌이하던 상태였는데. 이미 지나버린 후회의 순간을 되돌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아내가 얘기하는 대로 고스란히 들어주는 게 최선이다.
핑계를 대자면 당시엔 회사가 최우선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성장하고 연봉을 올리는 것만이 가족의 행복과 직결되리라 생각했다. 틀린 생각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안타깝기는 하다. 흘러가 버린 뒤에야 아쉬움이었구나 회상해 볼 따름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면 조금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특별히 바뀌는 것도 없겠지.
"아빠~"
"응. 다 놀았어? 데리러 갈까?"
"네-"
"자기야 애들 데리고 올게."
아이의 연락에 부리나케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시동을 걸고 아이를 만나서 해줄 말을 떠올렸다.
.
.
.
"아빠~!"
"재밌게 놀았어? 가서 씻고 간식 먹자."
"네-"
"즐거웠어?"
"엄청요. 날씨가 좀 춥긴 했는데 축구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좋았어요. 내일도 또 놀고 싶다."
"내일도?"
"응. 내일도!"
'내일도'라는 말에 그만 기분이 착잡해졌다. 내일 딱히 계획 세워 놓은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아이가 나가 놀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허해지는 게 아닌가. 아내의 말대로 '내가 살짝 중증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일은 우리 같이 있는 게 어때?"
"늘 같이 있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 그래도 아빠가 맛있는 것도 만들어주고 게임도 하고 이러면 좋지 않을까?"
"그것도 늘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렇긴 한데 말이다. 아니다. 그래 내일도 놀으렴."
아내가 했던 충고처럼 너무 품 안에 가두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마마, 아니 파파보이로 키울 셈이 아닌 이상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닐 거다.
"왜요? 왜 말을 하려다 말아요?"
"음. 도로 건널 때 차 조심하고, 낯선 사람이 어디 가자고 하면 따라가지 말고..."
"아빠. 그런 건 학교에서 날마다 배워서 나도 다 알아요. 날 너무 물렁하게 보는 거 아니에요?"
"아빠한테 넌 아직 애기탱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리고 나도 다 조심하고 다닌다니까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잠깐만... 이제 제법 심도 깊은 대화도 가능하잖아?'
어느 순간 의식하지 못하던 사이에 아이가 훌쩍 성장해 버린 듯했다.
여전히 품 안에 두고 키우고 싶은 나의 욕심이 존재하나 이미 아이를 품기엔 많이 커버린 모양이다.
억지로 가두려 해 봤자 역효과만 일어날 게 분명하다.
"아빤 날 너무 애로 봐. 나도 이제 알 거 다 알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상념에 빠져있던 내게 아이가 말을 건넸다.
"조심히 다닐게요. 그리고 아빠랑도 많이 놀아줄게요."
"커서도?"
"응."
나는 웃으며 아이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약속해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이 또한 웃으며 내 손가락에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더니 동의했다.
"분명히 커서도 아빠하고 놀아준다고 한 거다?"
"네. 아빠는 맨날 확인받고 싶어 해."
"약속 꼭 지키거라."
앞으로 아이는 점점 더 넓은 자신만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때쯤엔 오히려 지금이 좋았구나라고 회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다. 아이가 커서도 나와 놀아준다고 약속했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닐까. 쉽지는 않더라도 이제는 품에서 조금씩 놓아주는 연습도 해야 할 때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