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걸음
차표 한 장 손에 들고 떠나야 하네
예정된 시간표대로 떠나야 하네
송대관 - 차표 한 장
어제 들은 비보.
유명인의 작고 소식만큼 크게 다가오는 게 없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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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가고 있구나.'
항상 이런 식이다. 타인의 소식을 통해서만 멍하니 있다가 문득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와... ㅁㅁㅁ 벌써 제대한대. 시간 진짜 빨리 지나간다. 그치?"
아내는 보통 남자 연예인의 제대 소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는 듯하다.
반대로 난 부고 소식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곤 한다.
물론 인생이 무상 하다하여 허투루 살고 싶은 핑곗거리로 삼을 생각 따윈 일절 없다.
고개를 들어 즐겁게 게임 중인 아이들을 바라봤다.
'나도 저 나이 땐 이유 없이 즐거웠던 거 같기도 해.'
지금이 즐겁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결이 달라졌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더 이상 내게 "미래의 꿈나무가 될 거니까 파이팅!" 같은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이도 없다. 꿈나무가 되기엔 이제 꿈을 어느 정도 이뤘어야 맞는 나이대가 되어버린 걸까.
40대가 주는 무게감이란, 어쩌면 이러한 사회적인 시선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 거 같다.
꿈만 꾸며 살아갈 수는 없는 나이이기에 꿈과 환상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간 자칫 홀로 남게 되는 까닭이다.
30대 초에 뒤늦게 입덕했던 애니가 있었다. 워낙 유명한 애니라 이름만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을 터. 망설일게 뭐 있나 바로 공개한다.
한국명 [은하철도 999]. 마츠모토 레이지 감독의 여러 가지 작품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역사적인 애니 되시겠다.
물론 어린 시절 OST가 워낙 유명해 따라 부르기도 했었고, 몇 편 정도는 봤던 거 같은데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63 빌딩에서 상영하는 IMAX용 은하철도 999 극장판을 마주하면서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 후 DVD로 된 작품과 극장판을 사모았고, TV 판도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해 버렸다. 참고로 TV 판은 회차수가 꽤나 길기 때문에 상당히 긴 시간을 투자해서 봐야 한다.
"아니, 이게 이렇게나 시니컬하고 비극적인 내용이었어?"
톺아보기 시작한 999는 1화부터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취학 또는 초등학생이 보기엔 상당히 충격적인 소재로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름 검열이 심했던 시기였을텐데 어떻게 이런 작품을 더빙판까지 만들 수 있었을까?
물론 내가 좋아하는 다크와 블루함이 적절히 믹스된 탓에 개인 취향에는 99.9% 적중했다고 평하겠다.
애니에 대한 스토리를 언급할 생각은 없으니, 어쩌다 이 작품을 언급하게 됐는지만 짚고 넘어가 보자면.
바로 메텔이 살고 있는 행성까지 철이(호시노 테츠로)가 여행해 나가며 겪는 과정이 인생을 닮아 있어서다.
때로는 상남자스럽기도 하고 하남자스러워 보이기도 하던 철이는 또 다른 나 자신이었다. 어쩌면 닮고 싶었고, 로망을 실현해 가며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달까.
당시 내 모습은 철이와는 많이 달랐다. 집과 회사를 왕복하며 내게 쥐어지는 급료가 전부였던 시절. 급료 덕에 따뜻한 밥도 먹고 나름 행복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마음 한편이 언제나 공허했다.
'캐나다에서 자리 잡았어야 했는데...' 라거나,
'그때 그 회사로 이직했어야 했어.' 후회도 했고,
'좀 더 빨리 독립할걸.'이라는 생각도 했다.
여하튼 이루지 못한 꿈은 결국 후회가 되어 주기적으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런 내게 철이는 되고 싶던 또 다른 이세계 어딘가의 나 자신이었다.
나는 어디행 티켓을 손에 쥐고 있는 걸까.
송대관 씨의 차표는 그를 어디로 인도했을까?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예정된 시간표대로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내게 얼마만큼의 예정된 시간이 주어져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결국 티켓을 내고 탑승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아. 이제 때가 되었구나.'하고 깨닫게 되려나.
"오빠 지금 당장 아침밥 안 차리면 지옥행 열차 맛을 보게 해 줄게. ^ㅅ^"
"어? 어어! 당장 차릴게!"
아차 나의 본분을 잊어버렸다. 지금 티켓이 문제가 아니라 아침밥을 깜빡하고 늦게 차릴 뻔했잖아.
금강산도 식후경 이랬거늘 쯧쯧.
"오늘 아침은 냉동믹스 야채와 참치를 볶아서 무염 버터를 곁들인 특제 볶음밥 되겠습니다."
"뭐야. 그냥 흔해빠진 볶음밥 하나 만들면서 뭘 이리 사족을 붙여?"
"이게 그렇지가 않은 게 각 재료마다 간을 달리해서 각각 볶아서 층층이 맛을 쌓아 올리고 어쩌고-"
"됐고. 나. 배. 고. 파. 그러니까 당. 장. 차. 려."
"옙!"
뭐 일단 확실한 거 하나. 주방행 티켓은 확보해 놓은 거 같다.
예정된 시간이 되었으니 예정된 일과를 진행하도록 하자.
이제는 정말 주방으로 떠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