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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다닌 회사에서도 인연은 생기는 법

222 걸음

by 고성프리맨

한 달 정도 머물렀던 회사가 있다. 이 말인즉슨 한 달 후 퇴사 했다는 얘기다.

평소 입사와 퇴사를 쉽게 생각하고 결정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퇴사를 가벼이 여기고 정한 건 아니었다.


분명한 건 내게도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체적으로도 나랑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 문제잖아?!)


오늘 얘기는 그럼 퇴사와 관련된 얘기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정확하게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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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을 결정하기 전 속해 있던 회사는 4년 정도를 다닌 상태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아 보이는 근속 연수다. 당시 난 반복되는 업무와 파견근무에 지쳐 있었다. 회사에서는 도저히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길을 열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실제로 돈은 다른 데서 버는 상황이었으니 이해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처음엔 1년만 일하고 이직할 생각이었는데,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듯 몸이 적응하자 입으로는 궁시렁거리면서도 계속 다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근속연수가 쌓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4년 정도를 찍게 돼버렸다.


중간중간 면접을 보러 다니긴 했다. 단지 기술력이 뒤처져 있어서 뽑히지 못했을 뿐.

냉혹한 시장에서의 평가를 견뎌내야만 했다.

사실 냉혹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당시의 나를 떠올려보면 게으르기 짝이 없었다.

업무와 관련된 그 어떤 학습이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것과는 정반대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으니.


'안 뽑히는 게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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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얻어걸린 곳이었다. 게다가 내가 평상시 해보고 싶던 업무와도 연관성이 있어 보였으며, 달콤한 유혹일지언정 "그대가 하고 싶은 일을 맡겨드리리다."에 반해버렸다.


합격소식을 듣고 아내에게 제일 먼저 전화했다.


"나 이직할게!"

"......"


당시만 해도 지금보단 유약하면서 말도 잘하지 않던 아내였기에 일방적으로 나 혼자 떠듦에 가까웠다.


"지금 회사보다 연봉도 높고 커리어적으로도 좋을 거 같고 사실 알고 보면 이런 복지도 있고 쫑알쫑알-"


다녀보지도 않았으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은 회사찬양을 앞세워가며 이직사유에 당위성을 더해보려 했다.


"어. 집에서 얘기해요."

"으응."


기분이 나빠진 건가?
이직한다고 해서겠지?
뭘 그리 걱정하는 거야. 나 어디 가서 1인분 몫은 할 수 있다고!


후일담을 얘기하자면 아내와 단둘이 이직에 대해 얘기했을 때도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오빠가 하고 싶으면 이직해. 뭐 어디라도 상관없어. 돈만 벌어와 그냥."


생각보다 쿨하잖아? 대신 전제조건은 월급이었다.




[입사 첫날]


"자! 여기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하게 될 프리맨님에게 박수!"라고는 안 하고 그냥 조용히 돌면서 인사했다. 물론 개발팀을 벗어나 타 팀에 가서는 평소답지 않게 살짝 텐션을 올려서 밝아 보이는 척도 했던 거 같은데, 어디까지나 개발자 기준에서의 밝음일 뿐이지 일반인이 봤을 때 어두침침해 보이기는 매한가지였으리라.


"프리맨 옆에 J와 잘 지내요. 오래 다닌 친구고 잘하니까 많이 물어보고요. 그리고 나중에 사수역할도 해야 할 테니 잘해봐요 어디."

"안녕하세요 J."

"안녕하세요 프리맨님. 엄청 기다렸어요!"


당시 J의 눈은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내가 들어온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이었다고 한다.


왜 공석이었냐고?


할 말은 많지만 생략하겠다. 혼자만 좋은 경험해 보는 건 예의가 아니니 원하는 분이 있다면 체험 삶의 현장에 직접 투입시켜 드릴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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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저희 커피 마시러 가요!"


J는 참 친절한 사람이다. 특히 업무와 관련된 얘기를 참 좋아한다. 다른 얘기엔 크게 관심도 없다. 그런데 내가 만나본 개발자 중 개발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다 비슷했던 거 같다. 물론 이 또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건 인정.


신기한 건 당시의 나 또한 J와 비슷했다는 거다. 개발은 잘 못해도 기술 소식이나 써보고 싶은 언어 같은 것에 대한 환상이 한가득인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 둘은 제법 죽이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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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일 후]


"아 못 다니겠어요."

"안 돼요 프리맨사마! 어떻게 뽑은 사람인데! 제발 절 봐서라도..."

"그건 그렇지만. 죽을 거 같은데요?"

"2년 넘게 다닌 제게 하실 말씀이 있고 아닌 말씀이 있지..."

"그래서 J가 대단하다는 거예요. 어떻게 버틴 거예요 그동안."


이 대화에서 짐작될만한 단서 같은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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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닫고 글이나 써요.


예예...

이 회사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정확하게는 회사입장에서는 아닐 수도 있는데 일개 직원 입장에서는 문제처럼 느껴질 만한 인물이 하나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팀장.


회사입장에서는 반길만한 인재였다. 알아서 이것저것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개발과제를 어떻게든 수행해 턱 하니 결과물을 내놓는 사람이었고, 강철체력을 바탕으로 회사를 집 삼아 지내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정시만 되면 안절부절못하며 집으로 도망가려 하는 내 모습이 이뻐 보이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오랜 공석의 자리에 굴러들어 온 내가 나간다고 할까 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내가 아닌 J에게 잔뜩 표출 중이었다. 하지만 본심은 J가 아닌 내게 쏟아내는 것이렸다.


J에게 온갖 갈굼을 시전 하는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 XX 못해먹겠네.'


아내에게 다소 면목은 없지만 내 생각은 점점 퇴사로 기울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한 달을 버텼나 모르겠다. 아마도 한 달 치 월급은 받아내고 말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애기 분유값은 벌자.'


첫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정처 없이 떠도는 남편을 바라볼 아내의 심정도 떠올렸으리라.


버텨볼까도 생각했다.


'입사할 당시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자. 떠올려보자.'


Nothing.


"?"


결국 내게 주어진 역마살을 이기지 못해 다시 면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중엔 다소 민망하지만 예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가 팀장으로 재직 중인 곳을 찾아가기도 했다. 실로 오랜만에 팀장을 단 그에게 전화를 했다.


"어? 웬일이야?"

"헤헤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 그래."


연락두절이던 상대가 오랜만에 그것도 갑작스럽게 친근한 척을 한다?

꿍꿍이가 있는 거다. 내가 그랬다.


결국 그를 만나 전후사정을 얘기했고 면접 대신 낙하산 입사를 해버렸다. (이후의 이야기는 오늘 얘기와는 무관하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써보기로)




"J 잘살아야 해요."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뭐야. 나 몰래 설마 퇴사 준비를?!"

"... 미안하게 됐소."

"이 배신자! 흐흑. 절 두고 어디로 가요. 데려가요."

"미안해요. (T.O가 하나라서. 그것도 낙하산이라...)"

"팀장 이 XX. 결국 또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아닙니다 아니에요. 이게 다 부족한 제 탓이죠 허허."

"아주 떠나실 생각 하니 기분이가 좋으신가 봅니다? ^^? 앞으로 저는 뺑이칠 일만 남았슴다. 그대의 몫까지?"

"......"


결국 나는 나 살길을 찾아 떠났고 남겨진 그에겐, 그의 예언처럼 내 몫의 일까지 인계받아 뺑이를 치게 됐다. 실로 미안하다 아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후 우리는 온라인 후렌드가 되어서 아주 친근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직하시고 나니 일도 많아지고 행복해 죽겠습니다. 하하하 ^^.
여기도 그리 밝기만 한 건 아니라오. (웃음):
:벌써 이직한 지 6개월 됐는데 이직병 발동 안 하고 잘 다니시잖슴까?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합니다. J도 어서 사람살만 한 곳으로 가셔야지요 ^^:
:하마터면 욕이라는 것을 한 뻔했습니다 하하 ^^ 잘 지낸다고 하시니 다행이네요. 빨리 다시 돌아오시지요.
그런 입에 담지도 않아야 될 소리는 하지 마시지요? 의가 상할 뿐입니다만? ^-^?:


추후 그는 1년여 정도를 팀장 욕하면서 꾸역꾸역 버텨냈고 결국 인간승리를 하며 K사로 이직했다.


"축하해요!"

"감사함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저주받은 게 분명함다."

"왜요? K사면 우리나라 투톱 아입니까!"

"연봉이 상승하고 건물이 좋아진 건 좋지만 말임다... 어째서 저는 여기서도 똥 치우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일을 제게 하사하시더군요."


그래도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자리잡지 못한 채 여전히 떠돌이 신세로 지내는 나 자신이 비루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래도 뭐 어떠한가. 아내의 말대로 월급은 계속 벌고 있으니 그거면 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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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아. 제발 언제 철들래? 돈 벌어오라는 소린 안 할 테니까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


이제는 월급도 끊긴 지 오래. 끊기지 않는 건 아내의 잔소리만이 귓가를 맴돌고 있다. 나는 그런 잔소리를 음악 삼아 흥얼거리며 글을 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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