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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223 걸음

by 고성프리맨

오랜만에 그날이 찾아왔다.

그날이 자주 오지 않기를 바랐건만, 기어코 너는 또 찾아왔구나.

분명 메모해 둔 소재도 있고 아침에 일어날 때만 해도 무탈하게 써질 거라 여겼거늘, 어찌하여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인가. 일단 시작은 해봤는데 딱 보니 오늘 글도 푸념각이다.


'그날이 오면...? 어디선가 들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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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소프트사의 그날이 오면


이실직고해 보자면 시리즈 중 [그날이 오면 2]를 가장 먼저 접했다. 1탄은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386SX를 사면서 번들 게임으로 제공받았던 게임이었는데, 당시 중학생이었던 난 "집에서도 이런 게임을 돌릴 수 있다고?!"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엔 미리내라는 회사가 각인되었다.


'한국에서도 게임을 만들 수가 있구나?'


당시만 해도 오락실엔 대부분 일본에서 건너온 화려한 슈팅이나 액션 겜 혹은 아케이드 류의 게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국 회사의 이름을 달고 자리를 차지한 게임을 본 적이 없었는데 암암리에 '게임은 외국에서나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토록 오랫동안 오락실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게임회사를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게임 개발은 그야말로 남의 잔치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런 내게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 건 컴퓨터였다.


다크사이드 스토리, 화이트 데이 등. (플레이했던 게임 중 하필이면 갑자기 떠오르는 이름이 두 개가 떠올랐다.)



'뭐야 우리나라도 만들 수 있잖아?'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게임 회사에 취업해보고 싶다는 꿈이 모락모락 자라게 됐었나 보다.




'게임을 개발하려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일단 꿈은 가졌는데 뭘 해야 게임을 만들 수 있을지를 모르겠더라.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던 시기도 아니고, 주변에 프로그래밍을 하는 지인이나 친척이 있지도 않았다. 부모님한테 물어본다 해도 별다른 답안을 주지도 않을 거 같고.


그냥 게임이나 하자.


그렇게 다시 꿈은 뒤로 미뤄졌다. 게임 개발? 그거 뭐 어떻게 하는 건데?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난 그냥 게임하는 게 즐거웠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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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됐다. 밥벌이를 하긴 해야겠는데 '나 뭐해먹고 삼?'.

진로와 적성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상태로 성인이 되어보니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차라리 압도적인 재능이나 능력이라도 있었으면 고민 따윈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런 것도 주어지지 않은 평범한 삶이었다.


뒤늦게 고민을 시작했다.


'일단... 힘쓰는 일은 안 되겠어.'


배부른 소리겠지만 힘쓰는 일은 나와 맞지 않다고 선부터 그어버렸다. PC 수리업을 잠시 체험해 보니 바로 깨달았다.


'평생 이렇게는 못 살겠는데?'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게임 회사에나 취업해 볼까?'였다.


뭘 해야 될지도 모르는 주제에 감히 게임 회사에나 취업?

지금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긴 하다만 원래 이십 대 초라는 게 패기 하나로 먹고 들어가는 시절 아니던가.

이력서에 게임 개발 경력으로 내세울 건 한 개도 없었지만 혹시라도 눈먼 회사가 있어 나를 면접장에 불러주기를 바랐다.


불러만 준다면 "이 한 몸 불살라서 영혼을 팔아서라도 노예처럼 일해보겠습니다!"라며 나의 의지와 열정을 피력해 보리라.


다행인 점은 이력서 보낸 게임회사 중에서 한 군데도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는 점.


'난 할 만큼 한 거다? 어? 내가 나쁜 게 아니라 게임회사에서 기회조차 주지 않는 이 현실이 나쁜 거라고!'


고작 이력서 써서 보낸 걸 가지고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다니. 게다가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 뽑아만 주면 최선을 다해서 잘해보겠다니. 열심히 노력해 온 사람들에 대한 기만도 참으로 다양하게 할 수가 있구나.




결국 그날은 오지 않았다.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꿈이 저절로 이뤄질 리가 없지 않나.


나중에서야 들었지만 게임 회사 특유의 크런치 모드라는 게 있다는 걸 들었다. (설명은 링크로 대체)


'와 큰일 날 뻔했네. 하마터면 갈려나갈 뻔했잖아?'라고 야근을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아니지 아니야. 통칭 개발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개발자가 내 꿈 아니었든가?" 꿈은 이뤘구나(?)


내가 맛보지 못했던 포도는 신포도야라는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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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글이 잘 안 써져서 그날이라는 표현을 써봤더니, 그날이 오면이라는 게임 제목이 떠올랐고, 이지경으로 글이 써졌다?


"그래도 글은 썼지 않습니까. 그것도 2,000자를 훌쩍 넘어섰네요."


분량집착남인 난 뻘글을 쓰면서도 이토록 최소 분량만큼은 꼭 채우는 것이다.


-그걸 자랑이라고.


타율이 형편없더라도 어떻게든 출루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달까.

비록 한 12부 리그쯤 어딘가에서 뛰고 있는 중이지만, '오늘도 어떻게든 1루를 밟아보려는 노력을 하나 보군.' 정도로 바라봐주면 좋겠다.


쓰고 또 쓰다 보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써지려나.


아무튼 정해져 있지 않은(혹은 나만 모르는) 길을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 연유로 오늘도 어떻게든 글 하나를 투척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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