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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방울방울, 추억 파는 남자 줄여서 추파남

224 걸음

by 고성프리맨

고등학교 시절 PC방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진 다소 매니악한 취미에 가까웠던 PC 게임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시기였달까.


당시 유명했던 게임은 단연코 [스타크래프트]였다. 초기 프로게이머도 등장하고 급기야 광고를 찍는 이까지 생겼으니.


쌈장.jpg https://www.gamemeca.com/view.php?gid=1602022


-그러니까 오늘은 스타크래프트에 관한 이야기로군?


후후. 아니다. 왜냐하면 난 스타크래프트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추후 프로리그가 출범해 방송으로 나오는 걸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했지만, 직접 플레이하는 재미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자칭 게임덕후였던 내가 좋아하던 게임은 따로 있었으니.

이름도 찬란한 영광의 게임 [포트리스 2]되시겠다.


포트리스.jpeg 포트리스 2 블루


당시 난 PC방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어서 주로 집에서 게임을 즐겼다.


-가자고 하는 친구가 없었던 게 아니고?


"...... 아픈 곳은 건드리는 게 아닙니다만. 그리고 고딩 시절엔 나름 교우관계가 원만했거든요? (믿거나 말거나)"


이때 내가 주로 즐기던 맵은 Valley라 이름 붙여진 밸리맵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 맵이 인기를 끌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포트리스를 좀 한다 하는 사람은 무조건 밸리맵이었다. 간혹 스카이맵이나 기타 맵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게임의 회전율을 높일 수 있는 밸리맵이 근본이었다. 게다가 길드라 불리는 곳에서 활동을 하려면 필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포트리스 2 블루에 빠져들었던 주된 이유가 등장했다. 바로 길드‼️

인생 첨으로 길드원이 되어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미 유명 길드가 많이 있었다. 포트리스에서 제공하는 유저 랭킹을 보다 보면 앞에 [길드명]과 같은 형태로 닉네임을 만들어 놓았기에 길드명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높은 순위권에 위치한 길드에 들어가는 건 쉬운 일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했고, 나름의 인맥이 필요하달까. 아무나 유명 길드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내 실력은 "음... 나쁘진 않아. 그렇다고 특출 난 것도 아니지." 이랬다.

포가 좀 쏴지는 날에는 백발백중에 가깝다가도, 컨디션 난조인 날엔 그야말로 트롤 그 자체. AI가 아닌 인간적인 면모를 겸비하고 있었다고 밖엔 말 못 하겠다.


그래도 실력은 꽤 준수한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맵에 대한 이해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도라 함은, 일명 풀샷(앞뒤 생각하지 않고 스페이스 바를 눌러 무조건 최고 속도로 포를 쏘는 행위)을 해서 상대방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각도와 풍향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다는 말 되겠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어느 위치에 존재하던 기계적으로 적을 처치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음을 말한다.

그런고로 내가 속했던 길드에서는 종종 나를 길드전의 정예멤버로 초대했다.

하지만 멘털이 문제였다. 평소에 아무리 잘하면 뭐 하는가. 막상 수능 시험 당일날 배탈 나면 끝장인 것을.

내가 그랬다. 길드전에만 참가하면 그야말로 구멍이 따로 없었다.


[야... 꺼져.]

[네.]


결국 길드장이 귓속말로 떠나 달라는 정중한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의 호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이며 조용히 게임이 끝남과 동시에 퇴장했다.


현실 세계에서도 그러더니 온라인 세상에서도 역시 경쟁과 나는 맞지 않는 것인가?

평화를 추구하는 삶이란 이상향과도 같은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나는 길드명은 달았지만 야인으로서의 겜생을 살아가게 돼버렸다.

물론 불행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난 피 말리는 길드전보다는 채팅위주의 만담에 익숙한 토크형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지인들이 모인 방에 들어가 다 같이 밸리맵을 유유히 즐기며 우리는 대화에 열중했다.

게임은 그저 거들 뿐이었다. 부차적인 것에 가까웠달까? 유유상종이라고 나와 같이 노는 멤버들 또한 실력은 비슷했다.




[오빠. 우리 포앤 할래?]

[응? 그래.]


당시 포앤(포트리스 내에서의 애인)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중학생이었던 그녀는 일면식도 없이 당돌하게 포앤 선언을 했다. 물론 이후로도 직접 만나본 적은 당연히 없었다. 살고 있는 거리도 멀었을뿐더러 선천적으로 여자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기도 했어서였다. (맞다. 모쏠의 전형적인 특징을 전부 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여자 앞에서는 땀만 뻘뻘 흘리며 눈도 못 마주치고 말도 잘 못하던 아이, 그게 나였다.


그리고 말이 애인이었지. 사실 그냥 온라인 소꿉놀이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거의 매일 게임에서 만나 잠깐씩 게임을 즐기는 게 전부였다. 딱히 서로에 대해 크게 궁금해하는 것도 없었다. 단지 농담 따먹기나 시시껄렁한 얘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

.

.


[야야! 빨리 길드전 좀 참여해야겠어. 지금 사람이 부족해!]

[저 지금 포앤 하고 노는 중인데염?]

[아오 빨리 와. 너 없으면 안 돼. 저번에 내가 뭐라고 한 거 미안하다.]


'이런... 길드장이 사과를 다 하시네?'


당시 권력 앞에 한없이 약해지던 난, 권력자가 사과를 하자 금세 과거에 뭐라고 했던 기억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 투지가 불타오르는 게 아닌가?


'그래. 설욕전을 치르러 가야겠어.'


[오빠! 뭐야 왜 말도 안 하고. 흥. 칫. 뿡.]

"......"

[어어? 뭐야 나 갈래!]

"......"


그렇게 그녀도 떠나보냈다. 마치 계백 장군이 황산벌 전투에 앞서 가족을 마지막으로 대하던 모습과 내가 다를 바가 무엇이냐. 비장한 마음으로 길드전으로 뛰어들었다.




"어... 저 죄송하지만 여기까지만 쓸게요 ㅎ."


-미, 미친...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왜 글을 쓰다가 말아요?


"읽고 계셨습니까 휴먼?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뭐 하는 짓이야!@#$@#$


쓰다 보니 생각했던 방향과 전혀 다른 글이 써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분량도 살짝 넘어서버렸다.

정확하게는 이제 가족과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아빠! 오늘 초콜릿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요! 지금 씻지도 않고 뭐. 해. 욧!"

"오빠. 장난해? 다 준비하고 오빠만 준비 안 했어!"

"......"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다. 내가 길드전을 위해서 포앤을 버리는 선택까지 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가족을 버려서야 되겠는가?! 이 나이가 되어서 가족 외엔 아무도 없는 내게 가족을 저버리면서까지 포트리스 얘기만 계속 써서야 되겠는가 이 말이다.


-아니... 본인이 써놓고 왜 그래 진짜.


그러니까 다음 기회에 포트리스 얘기는 다시 써볼게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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