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걸음
충북 음성까지 대략 240km 정도 거리였으니, 왕복이면 480km 정도겠군.
추가적으로 진천군에 숙소를 정한 탓에 왕복 80km가 더해졌다.
아내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다녀온 외조모상에 대한 기록.
아직 발인날이 하루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느꼈던 감상을 남겨놓을까 한다.
"오빠. 삼촌들이 날 몰라보네."
"어?"
"결혼하고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몰라보시더라고."
"그렇게 오래됐나?"
"8년 정도? 뭐 중간에 잠깐씩 뵙긴 했던 거 같은데 스쳐가듯 봐서 그렇겠지. 나도 그 사이 늙었잖아."
내 눈엔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않는 그녀지만 그건 아무래도 계속 같이 함께 살아온 영향이 크겠지.
확실한 건 나와 결혼 이후 아내가 외가에 방문한 횟수는 0에 수렴하는 게 사실이다. 혹시라도 내 탓을 할지 모르니 이 얘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야겠다.
"잠깐. 내가 왜 못 갔었는지 생각해 보니까, 이게 다 너랑 결혼해서잖아?"
"아, 아닐걸."
"아니야. 확실해. 결혼하고 나서부터 외할머니도 못 찾아뵙고, 네놈 수발드느라 꽃다운 시절이 다 흘러갔어!"
하고 싶은 말이 몇 개 떠올랐지만 이곳은 아내의 홈그라운드니 만큼 자제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랑 결혼해서 못 간 거 맞다.
일단은 운전할 차가 없었고.
"운전도 못했잖아."
운전도 못했으며. 날마다 일에 치여 살았고.
"쉬는 날에도 드러눕기 바빴잖아."
쉬는 날엔 드러눕기 바빴었던가? 그런 걸로 치고. 가고 싶은 의지도 없었거니와.
"맞아. 오빤 늘 그랬어."
이것저것 다 따져보니 당신 결혼 잘못했네.
"어쩌다 날 만났어 그래? ^^"
"뒤.. 그만해라. 참겠어 이번엔."
어쨌거나 10여 년의 세월은 한때는 함께 살았던 삼촌들의 기억 속으로부터 그녀가 멀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나 보다.
장모님도 오랜만에 뵀다.
"아니? 왜 이리 홀쭉해지셨어요?"
평소 내 기억엔 항상 살짝 통통하시던 기억으로 존재하던 장모님이셨는데, 어째서인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셨다.
"허리가 아파서 살을 좀 뺐어."
"......(아니. 그게 살을 빼고 싶다고 맘만 먹으면 그리 쉽게 빠지는 거였습니까?)"
어머니를 떠나보낸 탓인가 장모님께서는 뭔가를 많이 내려놓으신 듯해 보였다.
어딘가 힘도 많이 빠져 보이고, 그냥 시간이 흘러 발생하는 이벤트에 '그럴 수도 있지 뭐.'라는 태도를 보이시는 듯 보이기도 했다.
말은 나를 향했으되 눈길은 딸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들릴 리 없는 눈빛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문장을 읽어내는 중이었다.
'얘야 흰머리가 늘었구나. 가장 노릇하느라 스트레스가 많나 보다.'
'그나저나 왜 이리 늙었니? 엄마인 나보다 딸인 네가 더 늙어 보인다 얘.'
'B서방은 여전히 백수구나. 이제는 뭐 하라고 말하는 것도 지친다. 알아서들 해.'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공교롭게도 육개장을 비롯한 반찬이 차려져 있었다.
'고개 숙인 김에 한입 할까?'
면목이 없어서 고개 숙인 김에 한참 동안 열심히 수저를 이용해 입을 바삐 놀렸다.
이것은 배고픔 때문이 아니다.
절대로 배고픔 때문이 아니다.
하지만 맛은 좋네.
낯선 사람이 많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식 이후 왕래가 거의 없었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알 수가 없지 않나.
그래도 일단 눈길이 마주치면 최대한 공손히 인사했다. 90도에 가까운 인사였다.
그러면 상대방도 누군지 잘은 모르지만 일단은 같이 맞인사를 했다.
"그런데 저 사람 누구지?"
"글쎄... 아는 사람 아니었어?"
"그런가?"
이런 대화를 나누진 않았겠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실은 내가 그랬으니까.
그래도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와야 될 자리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제때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다시 한번 들었다.
그리고 나의 머리가 꼿꼿하지 않고 제법 유연하게 숙여질 수 있음에 감사했다.
원래 사회생활 팁 중 팁은 웃는 얼굴로 인사하기랬던가.
기왕이면 크게 "안녕하세요!"라고 말까지 덧붙이면 더 좋겠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큰 목소리는 내지 않은 채(원래도 목소리가 모기소리만 하다) 불안한 눈빛으로(나는 웃는다 생각했건만) 인사를 하길 잘했다.
혹시 또 모르지 않나. 비록 오늘은 아리송해하며 서로에게 의문을 품었을지언정, 다음번엔 "아!" 하는 외마디와 함께 진짜로 한눈에 알아보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사진 속 할머님은 웃고 계셨다.
그 웃음이 나만을 위한 웃음은 아닐 테지만, 나는 장례식장에 와준 모든 이에게 보내는 그녀의 미소라고 생각하려 한다.
죄송하게도 몇 번 뵙지 못했다. 손주사위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아내는 결혼 전에 할머니께 용돈을 드렸었는데, 하필이면 결혼과 동시에 용돈 지원도 끊어졌다.
-당신이 눈치 준 거 아니야?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 그렇게 쓰레기는 아닙니다. 그냥 재활용되는 수준?"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못했지만 아마 아내도 눈치를 봤을 거 같긴 하다.
"아마도가 아니라 100%야. 니 눈치 보느라 못 드렸다 왜? 어쩔거야앗?"
"......"
'아이가 태어났고,
집을 사느라 대출을 잔뜩 꼈으며,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다 보니
늦어버렸네. 미안.'
아내에게 보내는 나의 핑계.
"오빤 모르지? 할머니한테 내가 용돈 드렸던 거 전부 다 모았다가 나한테 금 사서 선물 주신 거."
몰랐다. 맛있는 거 사드시고 즐거운 여행이라도 한 번 더 하셨어야 했는데 어째서 한 푼도 안 쓰시고.
B서방. 손녀를 잘 부탁하네. 이것이 할미의 마음이라오.
문득 돌아가신 지 오래된 나의 증조할머니와도 겹쳐 보이시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미 사진 속에 인자한 웃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보내고 계시는 아내의 외할머니는 먼 길을 떠나셨다.
내가 아내에게 조금만 덜 눈치를 줬더라면...
아내의 질문에 '침묵'으로 답하지 않았더라면...
입관식을 끝내고 테이블로 돌아온 아내는 울고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덜 이기적이었더라면 오늘 아내는 눈물을 덜 흘렸으려나.
내가 할 수 있는 할머님에 대한 보은은 아내를 잘 보살펴 주는 일뿐이겠지.
다시 한번 영정 속 할머님께 마음을 담아 인사를 드렸다.
'걱정 마세요. 잘 보살피겠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할머님.'
"아빠, 사람은 왜 죽어요?"
얘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참으로 어렵구나.
"안 죽으면 안돼요?"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아닌데요? 엄마가 저렇게 눈물 흘리는 건 별론 데요?"
길어질 질문을 피하기 위해 나는 말을 잘라야만 했다.
"언젠가 아빠와 엄마도 떠날 날이 올 거야.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말 잘 들어 줄거지?"
"엄마... 진짜예요?"
참고로 아빠가(나잖아!) 해온 구라가 너무도 많기에 둘째는 보통 엄마에게 진품명품 감정을 신청하곤 한다.
"응. 사실이야."
"......"
아내의 말에 아이는 말을 잃었다. 애석하게도 이번에 애비가 했던 말은 진실이었단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장례식장에 아이들을 오래 두는 게 조금 기분이 묘해서 발인날까지 함께하지 못하게 됐다.
누군가에게는 "참 유난스럽네."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고, "그래. 아직 어린아이들이 장례식장에 오래 있는 건 좀 그래."라며 공감해 주는 이도 있으려나.
하지만 아내는 발인까지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이 무겁기만 한 모양이다.
"어서가. 삼촌들한테 인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우리 앞에 장모님이 친히 나서서 길을 터주셨다.
나는 다시 한번 면목이 없어졌다. 이번엔 차려진 밥상도 없는 고로 갈 곳을 잃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참으로 민망해졌달까. 그때 아이들이 나섰다.
모든 이의 시선이 우리 애들에게 쏠렸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어린 손님들만큼 어른의 시선을 받기 쉬운 존재는 없는 것이다.
"그래... 아쉽다. 그래도 발인까지 보고 가면 좋았을 텐데. 아이도 어리고 그래. 이게 맞지."
"다음엔 또 언제 보려나? 너무 많이 변하지 마라. 그러면 그때도 못 알아본다 허허."
"자자. 여기 애기 용돈."
빠르게 후다닥 인사를 나누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아이 손엔 용돈이 들려 있었다.
"oo야, 돈 줘. 엄마가 저금할게."
"싫어요! 전에도 그렇게 말해놓고 다 쓴 거 아니에요? 우리한테 나중에 0 원줄 거 아니에요?"
슬펐던 아내의 감정을 일순간 싹 사라지게 하는 매직.
격렬한 저항 끝에 용돈은 결국 아내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하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이 돈 엄빠가 쓰지 않고 모으는 거 맞으니까 믿고 기다렷!"
10년 뒤에 두고 보자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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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