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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증상을 겪어 본 적이 있어요.

227 걸음

by 고성프리맨

사실 내겐 오래된 고질병이 하나 있다.


-이제는 쓰다 쓰다 지병까지 언급할 정도로 소재가 떨어졌나 보쥬?


고질병이라 표현했다 해서 안 좋은 신체 부위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마음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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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20대 중반 좀 더 정확하게는 26살 정도였으려나.

지금은 모이는 애들끼리만 모이는 상황이지만, 당시엔 반창회(혹은 확장된 동창회)가 자주 열렸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고 모인 아이들은(더 이상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다들 자기 PR에 열을 올렸다.


영업, 보험, 일반직장인, 의사, 백수 등. 다양하다면 다양한 직업의 분포를 선보이는 와중에 몇몇의 자랑이 시작됐다.


"이번 달에 한 오백 벌었나? 넌 얼마 버냐?"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고 그닥 친했던 사이는 아니었는데 술이 문제였나.

지금 같았으면 웃어넘기고 말았을 발언이었을 뿐인데 당시의 난 긁혀버렸다.

왜냐하면 당시 내가 받던 월급의 수준이 너무나도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급여라 함은 상대성이 존재하는 항목인 만큼 우열을 따지기가... 쉽네?

많이 버는 게 최고시다.


정확하게 내가 긁힌 부분은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급여 수준이 별 볼일 없었다는 데 있었다.

물론 일에 대한 자부심이 없던 건 아니다. 하지만 자부심은 돈 앞에서 쪼그라들었고 얼굴은 웃지만 속은 잔뜩 뒤엉켜 있었다.


그러다 불쑥 마음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검증도 되지 않는 거 그냥 구라 쳐. 절친도 아니고 두 번 볼 거 아니잖아?'


그리고 유혹에 넘어가버렸다.


"야. 프로그래머도 나쁘지 않아. 나는 아직이지만 우리 선배들이 얼마나 많이 받는 줄 알아? 나도 곧이야 곧!"

"뭐래 ㅋ 알았어 인마. 마셔!"


차마 내가 직접 받는다고 거짓말은 못하겠어서 알지도 못하는 선배를 만들어 냈다. 그렇게 허구의 존재가 탄생했고 한동안은 바닥난 자존감을 채워줄 필요가 생길 때마다 그가 등장하게 됐다.


'허언증의 시작...'


그렇다. 내 고질병 중 하나 허언증은 그렇게 탄생했다.




모든 게 자격지심에서 출발했다.

내가 거리낄 게 없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상관도 없을 일을, 괜히 혼자 부끄럽다고 느끼거나 찔려했다.


'나는 이 모양 이 꼴인데 다른 애들은 잘 나가네?'


아직 이십 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아득한 격차가 벌어진 것만 같은 아찔함에 속이 잔뜩 상했다.


가난한 집구석에 태어나,
평생 일만 하다가,
집이라도 하나 장만은 할 수 있으려나?
부모님은 늙어가고,
모은 돈은 없는 데다,
누군가와 결혼해서 살아갈 수가 있기는 할까?


왠지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못된 성정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고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 시작했던 허언(거짓말의 이명)은 점차 과감해지고 커졌다.

급기야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믿었고, 마치 경험한 것처럼 착각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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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허언의 늪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마음속에서는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늪으로 빠져들면 다시는 나오지 못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야 동창회 나올 거지?]

[미안. 요즘 일이 바빠서.]

[이번에는 다른 애들도 많이 온대. 오랜만에 만나서 재밌게 놀자.]

[진짜로 미안. 요즘 회사 일이 진짜 많아서 그래. 상황 봐서 갈게 그럼.]

[어. 꼭 와라!]


고민하던 중 술자리 초대 문자가 날아왔다.


'만약 저 자리에 나간다면 나는 또 무심코(라고 포장된 거짓) 허언을 해버리겠지? 그렇게 되면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돼.'


멈춰야만 했다. 거짓은 진실과 달리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는 작은 욕망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

그러기 전에 나는 스스로를 지켜야만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허언->허세] 정도로 많이 나아졌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허세도 거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동창회는 그 뒤로도 몇 번 더 참석하긴 했는데, 당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주 못 가게 돼버렸다. 내게는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천성적으로 허세와 허언을 싫어하는 그녀 덕에 내 병은 98% 정도 완치가 되었다.


나머지 2%는 뭐냐고?

잠재적 가능성이랄까...


100% 완치된 줄 알았었는데 강원도 고성으로 이사 온 초기에 아직도 내게 허세의 기운이 남아 있음을 감지해서다.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나 백수요 허허."라고 말하기가 싫어서였는지, 자꾸만 있어 보이는 척을 하려는 게 아닌가?


그럴 때마다 아내가 말을 꺼냈다.


"아니 뭘 그렇게 티를 내려고 해 자꾸? 그냥 가감 없이 솔직하게 얘기해도 되잖아? 죄지은 것도 아니고,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왜 혼자서 괜히 발작버튼 눌린 사람처럼 그러냐고."

"그게 아니라... (전형적인 하남자의 화법) 앞으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거지 뭐."

"그럼 그렇게 되고 나서 얘기하면 되잖아."

"......"


맞는 말 앞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면 출세하면 되는 거다.

괜히 없는 데 있어 보이는 척을 하려 하니 문제가 되는 거다.


'아직 수양이 부족하네. 허세남의 기운이 2% 정도는 남아있구만.'


그래도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게 쓴소리를 해줄 수 있는 아내가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나도 나중에 자기한테 쓴소리 좀 해줘도 되지? :D"

"도장 찍고 싶으면 그렇게 해. 언제든 준비되어 있다고. 아참. 참고로 난 한번 마음이 돌아서면 그걸로 끝이라는 것만 알아둬."


이런 그녀 앞에서 내가 어찌 감히 허세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마음속 깊이 그녀의 말을 새기며 오늘도 가장 님의 출근길을 잘 바래다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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