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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염에 자주 걸려본 사람은 이해하려나.
이상하게 별 거 아닌 일에도 쉽게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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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기 모임에 참석했다. (실은 보충수업)
이끎이 선생님 한 분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데 왜 이렇게 야위었어요?"
"아, 제가 장염에 걸려서 며칠 잘 못 먹었더니..."
'살이 빠졌다는 것과 야위었다는 느낌이 다른데.'
최근 몇 kg이 빠지긴 했는데, 티가 나나 보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이 얘기를 전했다.
"그래? 그렇구나. 그렇구먼."
"......"
"왜? 뭐 할 말 있어? 보던 유튜브 봐도 될까?"
"어. 그러세요."
갑자기 서운함이 폭발해선 방으로 들어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서운함을 크게 티 내진 않았지만, 아내 입장에선 또 다르게 느꼈으려나.
'다른 사람은 보자마자 야위었다며 걱정하건만, 옆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생각하자 괜히 괘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가 우리 집의 주(柱)인 관계로 나는 속으로 울분을 삼켜야 했다.
'평상시였다면 별일도 아니었을 텐데, 이거 열받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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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컴퓨터 책상이 어지럽혀져 있었다.
평소 전자기기의 상태에 예민한 편인 난,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거 누가 그런 거야?"
아이들은 나의 어조만 듣고도 화가 났음을 짐작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이런 분위기를 원한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한번 내버린 화를 주워 담을 방법은 없다.
이미 내뱉어진 화는 아이의 기억 어딘가에 깊게 자리 잡아 버렸을 게 분명하다.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화내는걸 그쯤하고 멈췄다면 좋았을 텐데,
한번 고조된 감정을 다스리기란 왜 이리도 어려운지 결국,
"또 화를 내버렸다아아아!"
AM 7:20분 경의 일이었다.
잘 자고 있던 아내도 결국 거실로 나왔다.
"왜,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이렇게 화가 나 있어?"
"아니, 컴퓨터를 누가 이렇게 어지럽혀 놓은 거야?"
사실,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어지럽힘은 아내의 행위였을 것임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해가며,
화를 이어갔다.
"아니, 그게 뭐 어쨌다고. 별 일도 아닌데."
오히려 이 말에 나는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펑...!!
"아침 분위기 참 좋네 ^^"
"이야, 저 집 또 싸움 났다!"
분명 우리의 소리는 이웃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언쟁은 10분 정도 이어졌고,
승자가 없는 지리멸렬한 싸움은 파국으로 끝이 났다.
아이들은 침묵했고,
아내는 자리를 피했으며,
나는 덩그러니 남아 설거지를 했다.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
뒤늦은 후회가 알람처럼 머릿속에 켜졌다.
아내가 어젯밤 신경 써주지 않았던 행동에 앙심을 품은 자의 최후는 씁쓸하구나.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했던 이순신 장군님은 얼마나 위대한가.
나는 고작 장염의 아픔조차 온 가족에게 알리고 싶어 했으니.
부끄럽고 삿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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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몸무게는 어느새 65kg을 찍었다.
증상이 있기 전 67-8kg였으니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닐 수도 있다만,
전체적으로 몸에 힘이 없다.
'그나저나 죽을 챙겨 먹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호전이 안될까?'
실로 이상했다.
죽만 먹으면 자꾸 속이 더 안 좋아지는 느낌이랄까?
'혹시...?'
아내에게 물었다.
"지금 죽에 들어간 밥이 잡곡밥일까?"
"응. 귀리밥."
당장 GPT에게 질문을 올렸다.
녀석은 내 주치의답게 바로 신뢰도 높은 답을 내보냈다.
"님? 귀리밥 먹으면 장벽에 자극 주고 안 좋은데 그걸 먹고 있었다고요? 모르는 건 죄랍니다. 예!?"
"......"
그렇구나. 그렇구나.
지금까지 내가 장을 더 나쁘게 만들 걸 먹으면서 좋아지길 바라고 있었구나.
이런 젠장.
나는 다시 화살을 아내에게 돌리고야 말았다.
"귀리밥이 문제래는데에에에?!!!!"
"아, 그럼 흰 죽 먹어!"
"넵."
아휴, 나도 참.
뭐 이런 별 거 아닌 일들에 하나하나 화를 내고 있는지.
이게 다 '장염'때문이지, 절대 내 성질 때문이 아니라고.
정말이다.
이건 다 장염 탓이다.
암,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