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걸음
오랜만에 IT 관련 강의에 참석했다. 개발자를 그만둔 지도 벌써 4년이 넘었으니 실로 오랜만에 접하는 실무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잊고 지냈던 감각, 지식, 과거가 강의를 듣는 동안 조금씩 떠오르더니 끝날 즈음해서는 아련한 아쉬움 비스름한 감각으로 변해 있었다.
‘아… 혹시 직업이 있던 그때가 그리운 걸까?’
이미 관뒀을 때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니 단순한 그리움 같은 건 아닌 거 같다.
한때는 누구보다(상대적이다) 열정적으로 업을 사랑했었는데 한 순간에 차갑게 식을 줄은 전혀 몰랐다. 주변 동료에게도 정년이 될 때까지 눈이 침침하다 못해 안 보일 때까지 키보드에서 손을 놓지 말자던 다짐을 내가 가장 먼저 배신할 줄이야. 이렇게 들으면 엄청난 회사에서 대단한 프로젝트를 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 그 정도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 어떻게 보면 떠나보낸 연인에 대한 미련과도 통하는 감정일까? 경험상 미련엔 시간이 약이었던 기억이 난다.
여하튼 이대로 강의를 쭉 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살짝 생겨버렸다. 오늘은 맛보기 체험이었으니 각 잡고 제대로 90일 과정을 이수하면 어떨까라는 생각. 그러다가 이미 찍먹 해본 업계라는 생각에 살며시 고개를 들던 마음이 다시 사그라들었다. 어쩌면 그리운 건 그 시절의 반짝이던 내가 아니었을까? 이미 지나버린 30대지만 그 시절에 좀 더 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역시 이럴 줄 알았다. 한번 지나버린 시간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거라는 거. 그 시절의 내가 빨간색과 보라색의 어디쯤이었다면, 일을 그만둔 지금은 무색무취가 아닐까?
여담이지만 어제 아이가 아내에게 물어본 말이 있다고 했다.
“엄마. 아빠는 왜 일 안 해요? 이러다가 연금 같은 것도 못 타는 거 아니에요? 어디 공장이라도 취직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빠는 공장 취직했다간 몸 상하고 큰일 날 사람이야. 지금도 저봐... 골골대잖아.”
“그럼 어떡해요? 엄마만 힘들게 일하고…”
“한번 네가 아빠한테 물어봐. 왜 일 안 하시냐고.”
말을 전해 듣고 나서는 머릿속이 살짝 복잡해졌다.
‘천성이 게으른 탓일까?’
‘다시는 일을 못하게 될 사람이면 어쩌지?’
‘아이에게 어떻게 상황을 설명해 줘야 될까…’
내가 읽던 소설 속에 등장하던 일 안 하고 놀러 다니거나 도박하던 남편상으로 변해버린 건 아닐까라는 무서운 생각이 스쳐갔다. ⎯ 물론 나는 도박을 하지 않는다 ⎯ 많이 읽고 보고 생각하던 모습대로 변하는 건가? 결코 내가 원하던 아버지상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일이 이지경으로 된 거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수업은 Q&A 시간으로 넘어가 있었다.
처음엔 이것저것 물어봐야겠다 싶었는데 부질없을 거 같은 마음이 들자 질문을 포기해 버렸다.
‘어차피 취업할 것도 아니면서…’
사실 이대로 있는 게 괜찮을 리는 없다. 여력이 되는 한 계속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크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26년도엔 지금보다는 좀 더 이런저런 설명이 필요 없을 상황에 내던져지길(바빠지길) 바라본다. 부디 제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세요 산타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