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걸음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도 빠듯한 삶이다. 그렇다고 정말 바빠서 못 읽느냐고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니다. 시간은 있다. 남아돈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그렇다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애매하다. 백수의 시간 역시 남들과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빠르게 지나가니까.
회사에 다닐 때는 시간이 기어가듯 느렸던 기억이 있다. 시계를 볼 때마다
“아이씨… 아직도 이거밖에 안 지났어?”
중얼거렸던 날들이 분명 있었다. 지금은 반대다. 정신 차리고 보면 하루가 끝나 있다. 어딘가에서 군 생활 중인 누군가는 여전히 시간이 멈춘 듯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시간이라는 게 참 제멋대로다. 검색해 보니 이런 생각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비슷하다던데, 정확한 건 모르겠다. 지식 자랑은 내 담당이 아니니까.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오자. 지금 속도라면 1년에 읽는 책은 많아야 열두 권이다. 그것도 전공서 같은 묵직한 책은 거의 없고, 소설이나 가벼운 에세이가 대부분이다. 독서의 밀도가 높다고 하긴 어렵다. 물론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실패로 향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많이 읽는다고 삶이 극적으로 나아지는 것도 아닌 듯하다. 읽든 안 읽든 하루는 비슷하게 흘러간다.
젊을 때는 하루에 한 권씩 읽겠다는 사람들을 보며 은근히 따라 해보고 싶었다. 열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였다. 이제는 만화책조차 하루 한 권 읽는 게 쉽지 않다. 책을 펼치기까지의 과정이 생각보다 길다. 먼저 고르는 일부터가 일이다. 너무 무거워도 안 되고, 글자가 빼곡해도 손이 안 간다. 예전 같으면 참고 읽었을 책들도 이제는 통과 기준에서 탈락한다. 독서가 지식 자랑이 아니라는 걸 인정한 뒤부터는 기준이 단순해졌다. 어떻게든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그게 전부다.
“그렇게 귀찮으면 안 읽으면 되잖아요?”
누군가 이렇게 말할 법도 하다. 인정한다. 독서는 여전히 귀찮고 번거롭다. 집중력도 예전 같지 않다. 흥미가 충분히 생기지 않으면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멈춰 선다. 억지로 하루 몇 장씩 읽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계속 읽는 걸까. 소설 몇 권 읽는다고 삶이 나아질 리도 없는데.
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나는 쓰기 위해 읽는다.
혼자 머릿속에서만 굴린 생각으로는 쓸 수 있는 이야기의 범위가 너무 좁다. 표절을 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차용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일본 애니를 보다 보면 서로 닮은 인물들이 보이듯, 이야기 역시 완전히 무에서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새로운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계속해서 다른 이야기를 만나야 한다. 협소해진 인간관계로는 더 이상 인재풀이 넓어지지 않으니, 책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 달에 억지로 읽는 단 한 권의 소설이라도 놓지 않으려 한다. 그 억지가 언젠가 재미로 바뀌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따라 쓰고 싶어지는 이야기를 만난다면, 그 한 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한 달에 한 권 읽는 지금의 속도를 너무 한심하게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내 독서 습관에 관심조차 없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이 느린 독서가 쓰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 운동이니까. 문제는 준비 운동만 한다는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