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걸음
“제가 활자중독이라서요.”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번지는 해맑은 웃음.
모니터에 꽂힌 시선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어쩌다 그런 말을 듣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또렷하다.
활자중독.
처음 듣는 표현이었는데 멋있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는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런 사람이 진짜 있을 줄이야.
“저는 읽을 때 행복해요. 안 읽으면 불안하고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 앞에서 나는 괜히 작아졌다.
책을 좋아한다고 자부해 왔지만 감히 중독이라는 말을 붙일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목구멍까지 질문이 차올랐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요?’
결국 묻지는 못했다.
그녀가 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당신처럼 중독에 빠져보고 싶었어.'
시간이 많아지면 책을 많이 읽게 될 줄 알았다.
회사에 다닐 땐 바쁘다는 핑계라도 있었지.
지금은 그마저도 없다.
옆에 책은 놓여 있다.
그렇다고 책장이 술술 넘어가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책은 산다.
꽤 많이 산다.
쌓아두기만 한다.
가끔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린다.
여전히 읽지는 않는다.
‘어… 내일부터 읽자.’
그렇게 미뤄둔 책만 수십 권이다.
어쩌면 나는 활자중독이 아니라 책쇼핑 중독인지도 모르겠다.
사서 꽂아두면 다 읽은 기분이 드는 이상한 병.
요즘은 쓰는 사람을 자처하고 있다.
듣기로 쓰는 사람은 보통 많이 읽는다고들 한다.
나는 많이 읽지 않는다.
그래서 못 쓰는 걸까?
아니면 못 쓸까 봐 읽지 않는 걸까?
노트북 옆에는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가 놓여 있다.
집어서 한 페이지만 넘기면 된다.
정말로 한 페이지만.
그 행동을 며칠째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운동을 안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시작이 무겁다.
이럴 때면 어김없이 드는 생각.
‘과연 내가 글을 쓸 자격이 있을까.’
중독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제는 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다만 읽고 쓰는 사람이고 싶다.
대단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멈추지만 않는 사람.
십여 년 전의 활자중독 그녀가 문득 떠오른다.
지금 다시 만난다면 묻고 싶다.
“정말 안 읽으면 불안해요?”
그리고 어쩌면 이런 질문도.
“혹시… 읽는 걸로 도망친 적은 없었어요?”
그녀를 좋아했던 건지
그녀의 중독을 부러워했던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연도 마치 독서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덮이고
어떤 사람은 오래 붙잡고 읽게 된다.
나는 여전히 첫 장을 넘기는 일이 참 어렵다.
책도, 사람도.
그래도 오늘은 한 페이지를 읽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