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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카 Feb 10. 2020

BX 디자이너를 위한 라탄의 지혜

일관되지만 다르게 엮어내기

‘라탄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하며 바라본 BX 디자인 프로세스와 닮은 라탄 공예. '일관된 엮음'으로 꾸준히 형태를 만들어가고, 그 '일관된 엮음'을 응용해서 다양한 결과물을 선보이는 일. BX 디자인과 라탄 공예의 공통점이다.


'라탄'은 라탄 공예의 주요 재료가 된다. 목재 가운데서 가장 질긴 재료 중 하나인 라탄은 물에 젖어있을 때는 굉장히 유연하고 말랐을 때는 굳어버린다는 소재 고유의 특징이 있다. 이 재료를 가지고 서로 엮는 것이 대부분의 과정인 라탄 공예에서는, 중심이 되는 축을 유지하되 전체를 회전시키면서 적당한 힘으로 꾸준하고 정확하게 엮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방식 하나로 작은 소품부터 큰 가구까지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BX 디자인의 중심이 되는 '일관성과 확장성, 그리고 차별화'와 유사하다.



단 한 가지 재료, 덩굴 식물 라탄

‘라탄’이란, 동남아시아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야자과의 덩굴 식물을 칭하는데, 그 줄기가 길고 질겨서 공예 가구의 재료가 된다. 젖어있는 라탄이 말라 굳게 되면 과정에서 모양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재료들을 충분히 적셔주며 엮는 것이 잘 만드는 관건 중 하나였다. 이 날의 결과물은 기본적인 스킬만을 요하는 작은 그릇이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완성하는 데에 어떤 접착제도 사용하지 않고 재료의 고정성으로만 형태를 유지하는 방법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재료의 특성을 살려 다양한 결과물을 만드는 것은 '일관된 인상 주기'를 주목적으로 하는 BX 디자인에서 색상, 서체, 모티프 등의 '핵심 요소 세트'를 구성하는 것과 닮아있다. BX 디자인의 초기 단계에서 '어떤 요소를 선택하고, 어떻게 일관되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매우 중요하다. 이 '작은 선택'에 따라 결과물과 확장되는 디자인이 매우 달라지기 때문이다. 라탄 공예 역시 하나의 소재로 다양한 결과물을 낸다. 수많은 매체에서 브랜드의 일관된 인상을 전하는 방법은 라탄의 특징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유연하고 때로는 강한 줄기 '라탄'
<쏘카> 브랜드 색상
<쏘카> 브랜드 지정 서체



유지하며, 엮고, 확장하기

먼저, 날대와 사릿대를 구분한다. ‘날대’란 결과물의 뼈대가 되는 라탄을 칭하고, ‘사릿대’는 날대의 사이사이를 채워가며 점점 원형을 만들어가는 라탄을 말한다. 일정한 길이로 자른 라탄은 물에 흠뻑 적신 후, 열십자(+)로 날대를 만든다. 여기서, 미리 적셔놓지 않으면 금방 말라서 부드럽게 원형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어려워진다. 그런 다음 젖은 여섯 가닥의 날대를 반으로 살짝 접어 중심을 표시한다. 가로 방향으로 놓고, 접어 놓은 중심 표시에 맞춰서 다섯 가닥의 또 다른 날대를 세로로 열십자 모양으로 보이도록 올려놓는다. 그리고 날대보다 두 세 배가 긴 ‘사릿대’ 한 가닥을 가져와서 끝을 접어 열십자 축에 고정한 후 날대끼리 겹친 중심에 사각 테두리가 만들어지도록 엮어(되돌아매끼돌리기) 날대의 열십자 모양이 고정되도록 한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또 두 번 엮어 열십자 축에 두 개의 사각형 테두리가 생기도록 만든다. 


이 과정은 '그래픽 모티프'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서체나 색상 등의 고정 요소들은 응용되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그래픽 모티프는 응용을 통해 다양한 매체에의 적용할 수 있는데, 이때 브랜드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개념이 무엇이냐에 따라 일관성과 다양성의 기준이 달라진다. 쏘카는 '스페이스 프레임'이라는 그래픽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스페이스 프레임은 '주차 라인'의 형상이 토대가 되어, 좌우로 뻗는 '이동과 확장성'의 개념을 전하며 각종 매체에서 일관된 인상을 전한다. 기본 형태와 최소한의 변형만을 취하는 로고나 오프라인 사이니지부터, 일관된 인상을 잃지 않는 제한선 안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펼쳐지는 일러스트레이션까지. 변화를 꾀하는 와중에 우리 브랜드의 중심축을 어떻게, 얼마나 유지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중심축을 유지하며 사릿대를 엮어간다.
<쏘카> 그래픽 모티프, '스페이스 프레임'의 적용 원리



힘보다 꾸준한 균형

사각형 테두리 모양이 생긴 날대 중심부를 고정하며, 총 열 한 가닥으로 뻗어있는 날대 가닥들의 아래, 위, 아래, 위 사이로 사릿대가 지나가도록 라탄 전체를 돌리면서 계속 엮는다. 인내심을 갖고 계~속 엮는다. 그러면 사릿대, 즉 사각형 테두리가 점점 쌓이며 원의 형상이 나타난다. 처음에 나타나는 모양은 참 예쁘지 않다. 사각형도 아니고 원도 아닌 못난 모양만 보인다.  


여기서 느낀 첫 번째 노하우, 처음부터 완벽한 원형을 만들어내기 위해 욕심을 내면 오히려 모양이 더 미워진다. 그리고 나중에 되돌리기도 어렵다. ‘촘촘하게 엮어야 예쁘게 완성된다.’라는 말을 잘못 이해한 나는 있는 힘껏 사릿대를 당기면서 엮었는데 알고 보니 열십자 모양을 고정할 때만 힘을 들이고, 사릿대를 엮을 땐 힘을 크게 쓰지 않아도 되었다. 쌓여가는 사각형 테두리 사이사이의 간격만을 촘촘하게 유지하면 되는데, 나는 사릿대를 가지고 줄다리기를 했다. 그러면 손 때만 많이 타고 사방으로 균형이 맞지 않아 예쁘지 않은 모양이 나온다. 너무 강하게 당기다 보니, 남아있는 날대들도 과도하게 힘을 받아 나중에 모양을 매만지기도 어렵다. 차분하게 하나하나 엮어보면서 결과를 기다리면 되는데, 처음부터 너무 큰 결과를 바랐던 것이다. 사각형으로부터 시작하는 축에서 쌓여가니 ‘라탄’하면 떠오르는 원의 형태가 바로 나타날 리가 없는데 말이다. 


'우리 브랜드다운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것이 BX 디자이너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BX 디자인은 '심미성'을 넘어 '비즈니스와 운영'이라는 조건도 고려해야 한다. 미적 아름다움보다 더 큰 관점에서 '인식'을 디자인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당장의 결과물은 조금 어색해 보이더라도, 합의된 선택을 바탕으로 일관되게 나아가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적당한 힘을 주는 라탄 공예의 노하우는 BX 디자인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곳곳에 힘이 들어간 흔적이 보인다.


‘툭, 툭’

어찌어찌 그릇 한 개를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 두 번째 시도엔 ‘남은 세션 시간만큼 마음을 비우고 되는 데까지만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욕심 없이 두 번째 도전을 시작했다. 마음을 비워서일까? 저절로 엮는 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첫 시도에서는 그렇게 힘을 주고 돌렸던 것을 힘을 빼고 ‘툭툭 두 줄마다에 끼운다’는 느낌으로 라탄을 돌렸다. 침착하게 엮다 보니, 어느샌가 규칙적인 구조로 완성된 균형 있는 모양새의 그릇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때 생각했다. ‘처음부터 촘촘히’라는 노하우는 사릿대 간의 간격을 줄이라는 말이었지 줄을 당기는 힘을 말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때는 힘을 줘야만 촘촘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알게 된 두 번째 노하우, 힘을 빼는 것이 효율적이고 그것을 유효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중요하다. ‘툭툭해 그냥~.’ 예전 어느 상사가 자주 했던 말이다. 맞는 말이다. 웬만한 일들은 ‘툭, 툭’해야 잘 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잘 다져진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라탄에서 이 노하우가 주효했던 것은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오로지 한 가지 재료만으로 엮어서 완성도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오랜 시간 다져진 ‘시스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큰 확장성을 가진 보편적인 형태의 그래픽 모티프는 차별성을 띄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눈에 띄게 힘을 준 독특한 형태의 경우는 확장성에 제한을 받을 수 있다. 또, 과도하게 엄격한 가이드는 디자인의 확장 및 운영에 제한이 될 수 있다. BX 디자이너는 브랜드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어떤 개념을 전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차별성과 확장성의 중간지점을 찾아 '지속 가능한' BX 디자인 가이드를 만들어야 더 효과적인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말은 현재 국내 브랜드 디자인계의 대부분이 수긍하는 말이다. 하지만 '시스템이 없는 상태'를 겪지 않은 사람이 시스템을 만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인쇄, 설치, 디지털 매체 등 다양한 제작 및 설치 경험을 통해 어떤 것이 공통되고, 제한되는 조건은 무엇이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담을 때는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당한 힘과 균형'을 아는 경험 있는 '디자이너의 지혜'는 필수 조건이다.


균형과 지혜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선생님의 다양한 작품들



독특한 특성을 지닌 한 가지 재료, 일관되지만 노하우가 필요한 공법, 그리고 그 공법을 응용해서 차별성을 만들어내는 일. 한 시간 만에 배울 수 있는 라탄 공예의 ‘단순한 원리'로 만들어진 다양한 공예품이 시장에서 팔리고 있다는 사실은 BX 디자이너의 고민과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정의하고, 그 개념을 표현하는 디자인 요소를 만들고, 그 요소를 중심으로 일관성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차별화하는 일. 수많은 양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BX 디자이너를 위한 실마리는 어쩌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기법들보다 '라탄의 지혜'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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