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을 위한 미션 수행
교육의 빡빡함과 수술 후유증으로 몸은 천근만근으로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사니즘은 모든 상황에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 얼굴에 색을 입히고 오늘도 집 밖을 나선다. 전쟁터에는 그에 걸 맞는 갑옷이 필요한 법. 또각또각 구두를 싣고 백을 들었다.
비자 만들기
생활 바보인 나는 오늘도 내려야 할 역을 잘못 내려서 한 정거장을 지나쳤다 돌아왔다. 수 십년을 살아온 이곳에서는 정신줄 놓고 살아도 몸이 기억하겠지만 그곳은 다를 것이니 정신줄 잡고 살자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성북동 한 가정집에 위치한 네팔 대사관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대사관 같지 않아 지도 어플과 한참 씨름을 하게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전통 복장을 입은 무서운 마네킹에 한번 놀라고 그 보다 더 표정 없는 창구 직원에게 한번 더 놀란다. 이미 한 사람이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어 어렵지 않게 내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비자 양식을 작성하다 본적지와 맞닥뜨린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왜 굳이 이런 서류들은 본적을 쓰라는지 알 수 없다.
앞 사람이 볼일을 마치고 내 차례. 한참 한국인 직원과 네팔인 직원이 대화하느라 나를 모른척하더니 곧이어 차갑게 묻는다. '며칠짜리 비자예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당황한다. 몇일 짜리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나를 힐끔거리던 직원은 내 여권과 서류를 보더니 대충 알았다는 듯 접수하고 접수증을 내민다. 휴~ 다행이다.근무일 기준으로 4일이 지난 후에 찾으러 오라고 무표정하게 말해준다.
오늘의 미션을 완수한 해방감에 돌아오는 길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아기자기한 빵집에 들러 스톨렌을 사서 스타벅스에 갔다. 네팔에는 스타벅스가 없단다. 여러 나라를 여행과 출장으로 드나들었으나 스타벅스가 없는 나라는 처음이다.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오려는 것을 익숙한 것과의 잠시 안녕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떨쳐버린다.
사랑하는 붕붕이와 작별하기
아무리 사서 3년이 가장 똥값이라고 하지만 중고차 시장에서 나의 붕붕이가 받은 대접은 화가 난다.
주행거리 16천이 안 되는 아이가 헐값에 팔렸다. 내 아이에게 누군가 뭐라고 하면 드는 느낌이 이런 걸까 . 심장이 콕콕 쑤신다.
차와 운전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위로가 되어준 동반자였다. 방안에 셀프 감금되어 땅속으로 무한히 꺼지기만 하던 나에게 혼자서도 세상 잘 살 수 있다고 ‘괜찮다’고 안심시켜주던 녀석이다.
붕붕아 잘가! 많이 고마웠어!
세계 일주 떠나는 사람처럼 예방접종
세계 최빈국으로 이주하는 자의 제일의 미션. 예방접종이다. 여행 갈 때 그냥 가도 별 탈 없었다며 예방접종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자세를 견지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전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처럼 온갖 종류의 백신을 모두 몸에 주입했다.
나는 소중하니까. 쓸데없이 타지에서 아프면 나만 손해니까. 수년째 건강검진 결과지에 ‘A형간염 항체 없음, 접종 필요’라고 쓰여 있어도 무시했던 내가 이번에 드디어 접종을 했다. 더불어 장티푸스, 파상풍, 콜레라 등 온갖 주사를 맞고 말라리아 약까지 처방 받았다. 네팔은 말라리아 위험지역도 아닌데 말이다하하하 (민망).
온갖 종류의 예방접종을 하다 보니 모두를 한 번에 한 장소에서 하고 싶었다. 단 한 번의 주사로 끝나는 예방접종도 있지만 개중에는 일정한 주기로 2-3번에 거쳐 접종해야 하는 것도 있기에. 특히 공수병, 즉 인간 광견병은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이후 발병하지 않아서 희귀질병으로 분류되어 국가 기관인 국립중앙의료원 단 한 곳에서만 접종이 가능하다. 모든 예방 접종이 한 번에 해결되어 좋았던 것도 잠시, 공수병은 일정 간격을 두고 3회 접종이 필요하단다. 더 슬픈 것은 3회에 걸친 접종에도 불구하고 유효기간은 2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러모로 까다로운 병이다.
개에 대한 두려움이 없거나 설마 개가 사람을, 특히 나를 물일은 없을 것이라 자신하는 사람이라면 금새 포기했을 불편함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어릴 적부터 집에서 키우는 개조차 무서워 뒷문으로 다녔던 사람이 아닌가. 나는 열일 제쳐두고 접종을 해야 한다.
길거리에 누워있는 개님들과 날아다니는 원숭이님들아!! 제발 내게 다가오지 말아라. 좋은 의도든 나쁜 의도든 살짝만 스쳐도 반경 50미터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소리를 지르게 될 것이다. 그 보복은 사설 사냥꾼의 고용으로 갚아 주리라.
마지막 공수병 예방접종을 하던 때의 일이다.
주사를 놔주던 간호사님이 물으신다. ‘도대체 어디를 가시길래 공수병을 다 맞으세요?’
‘네팔이요’. ‘아! 네.....’
네팔이라는 대답은 마법이다. 상대로 하여금 다음 말을 잇지 못하게 해서 편리하다.
이사짐 보내기
이른바 단신 부임인 나는 옷가지와 책, 생활도구 몇 개를 넣은 10여개의 박스가 짐의 전부이다. 혹시 몰라서 몇 주분의 생활 소모품을 추가해도 10여개를 넘지 않는다. 오지 파견 경험이 있던 선배가 먹을 것으로 쌀 4kg와 고추장 1개만 딸랑 가져가는 내게 폭풍 잔소리를 했어도 굳건하게 책과 미용 마스크 시트를 더 넣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라들을 다니면서 먹는 것으로 고생해 본적이 그리 없다. 나의 주식은 빵, 과일, 샐러드, 치즈, 초코 등으로 세상 어디에 가나 다 있는 표준화된 제품들인 것이다. 미식가가 아님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다.
해외 이삿짐 운송업체에서 담당자분이 집을 방문하여 꼬박 5시간에 걸쳐 물건을 포장하고 정리해주셨다. 액체류, 밀가루 등 가루류 등 직접 가부를 꼼꼼하게 체크해주셔서 불편함 없이 짐들을 먼저 출발시킬 수 있었다. 나의 짐들은 어딘가의 창고에 보관되다가 현지 주소가 정해지면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나와 합류할 예정이다.
전세금 돌려받기
모든 회사가 비슷하겠으나 12월은 보고서의 달.
한 해 동안 내가 옆사람 보다 더 큰 효용을 회사에 가져다 주었으니 월급 더 줘야한다고 우기는 시간이다. 과자의 과대 포장이 대세이듯 이 세계도 그렇다. 포장이다. ‘성실하게 남이 보던 안 보던 꾸준하게 열심히’ 이런 말은 일찌감치 개나 줘야 한다. 부끄러움을 가지는 순간 낙오자가 된다.
퇴근하는 길에 부동산에 들렀다. 한 달 전에 내놓은 나의 전셋집은 단 한 사람도 구경 오지 않고 심지어 같은 아파트에 나의 전세집보다 더 싼 전셋집도 나오고 있다. 전세 만료까지 8개월이 더 남은지라 얼마간 비워둘 생각을 하지만 걱정은 걱정이다. 전세 값이 너무 큰 것이 불안하고 그것이 내가 가진 전 재산인 것이 불편하다. 내 한 몸 움직이는 거라 쉬울 줄 알았는데 새로운 곳의 준비보다 앉은 자리 정리가 더 어렵다. 출국까지 D-5 남은 날 저녁. 앉은 자리 티나지 않게 몸도 마음도 소지품도 가볍게 살자고 다시 한번 미니멀 라이프를 다짐한다.
출국. Bon Voyage
몇 백 킬로의 짐을 보내고도 뭐가 이렇게 많은지 내가 짐을 끌고 가는 것인지, 짐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도착해서 당장 생황의 불편함을 겪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모험심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싶다. 히말라야를 오르고 골짜기를 넘어 인근 마을에 있는 구멍가게를 가야하는 것이면 이유라도 당당하다. 최빈국이라고는 하나 차도 있고 현대식 마트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인데 단지 미지의 물품, 브랜드를 만난다는 두려움으로 짐을 바리바리 짊어지고 간다. 삶 전체가 현대문명의 결정체라서 단 한순간도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나의 얄팍함이 싫어지는 순간이다.
몇 달동안 사람의 온기 없이 비워져 있을 집에 작별인사를 고하고 핸드백까지 5개의 가방을 가지고 공항행 택시에 오른다. 짐이 많아 걱정했던 나와 달리, 그래서 택시 타는 거라고 따뜻하게 말씀하시던 기사님을 만나서 참 다행이다. 일주일짜리 출장이나 여행을 위해 공항에 가던 것과 별반 차이 없이 덤덤하다. 설레임도 기대감도 걱정도 없이 그냥 날이 왔고 나는 2년 동안 내가 있을 네팔로 향한다.
파이팅!! 굳이 잘못될 일도 없지만 잘못된다고 해도 죽는 일은 아닐 테니 긴장하지 않기로 한다.